지난 9일(현지시간) 흩날리는 눈발을 뚫고 핀란드 헬싱키국제공항을 빠져나와 시내 중심지 방향으로 자동차를 타고 50분가량 달리자 고풍스러운 건물이 많은 헬싱키와 어울리지 않는 '튀는'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물 전체가 유리로 뒤덮인 이 현대식 빌딩은 한때 핀란드의 자랑이었던 노키아가 연구개발(R&D)의 핵심본부로 사용했던 곳이다.
노키아가 빠져나간 이 건물에는 현재 핀란드 모바일게임 업체로 잘 알려져 있는 슈퍼셀 본사가 전체 건물 중 1개 층을 임대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핀란드 대표기업이 제조업 회사인 노키아에서 정보기술(IT) 벤처기업으로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핀란드가 위기를 기회로 바꿔 혁신에 성공한 대표 모델인 셈이다.
하지만 노키아의 몰락과 슈퍼셀의 부상으로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역전 스토리의 이면에는 우울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여전히 경제성장률은 제로 성장에 멈춰 있고 실업률은 급등하는 등 북유럽의 강국이었던 예전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지난해 12월 기준 핀란드의 실업률은 8.8%로 전년 대비 0.9%포인트 상승했다. 청년층(15~24세) 실업률은 이보다 더 심각해 같은 기간 3.2%포인트 오른 19.8%까지 뛰었다. 핀란드 청년 5명 중 1명은 일할 의지가 있는데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실업문제가 심각해지는 배경에는 핀란드의 최대 교역국인 러시아 경제불황 같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핀란드 정부가 역점을 기울여 육성하는 중소 벤처기업들의 일자리 생산능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예컨대 제조 대기업인 노키아는 R&D·생산·서비스 등을 통틀어 핀란드 국내에서 2만여명을 고용해왔으나 이 자리를 대체한 IT 벤처기업의 고용인 수는 2,000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았던 '앵그리버드'로 유명한 핀란드 게임회사인 로비오는 그나마 지난해 10월 전체 직원의 16%인 130명을 감원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일부 벤처기업은 핵심기술을 외국 대자본에 팔아 창업자만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회사 자체를 청산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이날 찾은 슈퍼셀 본사 건물은 공용공간을 제외한 지상 5개층 중 3개층이 임차인을 찾지 못해 텅 비어 있었다. 건물 로비는 퇴근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어 한산하게 느껴졌다. 이 건물에서 일하는 헨나 아넬리씨는 "노키아가 있을 때는 500여명 이상이 근무했는데 현재는 한창때의 3분의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은주 KOTRA 헬싱키무역관장은 "노키아의 사례에서 보듯 일자리 시장에서는 제조 대기업의 영향력이 여전히 크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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