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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80> 자판기를 아십니까


자판기는 즉석식품을 먹을 수 있는 기기로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사랑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음료수를 뽑아 마시는 기계였다가, 나중에는 과자나 도시락 같은 음식도 자판기에서 살 수 있을 만큼 진화했습니다. 자판기 몇 대만 가지고 있으면 돈 걱정할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죠. 역 안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자판기 2~3대 갖고 있는 분들은 꽤 여유있는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옛말인가 봅니다.

요즘은 자판기 사업의 수입이 시원찮다는 넋두리가 들립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절대적인 이용률 자체가 줄었다는 겁니다. 우선 가장 큰 이유는 ‘먹고 마신다’는 행위에 대한 관점의 변화입니다. 과거에는 허기를 속이기 위해, 또는 없는 시간에 빨리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자판기 식품을 이용했습니다. 빠르고 간편했으니까, 산업화 시대의 요구사항에 딱 맞는 식음료 소비 방식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최근 자판기에서 나온 음식들의 이물질 함유 해프닝이나 관리 실태에 대한 고발 등이 보도되면서 신뢰가 떨어진 상태입니다. 따라서 자판기는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지만 그만큼 자신의 건강을 희생해야 한다는 이미지를 함께 갖고 있는 셈입니다. 게다가 무언가를 먹고 마신다는 것이 사회적 행위로 바뀌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삶의 여유가 늘어나면서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리고 식사 자체보다는 소통을 위해 ‘약속’ 차원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는 문화가 정착되고 있습니다. 그 순간과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나 자판기는 그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과거 직장에서 회사원들의 짧은 소통을 대변하는 ‘자판기 커피’도 이제 에스프레소 머신이나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나오는 제품으로 대체된 지 오래입니다. 실제로 회사가 밀집한 지역에는 자연스레 커피숍도 밀집되어 있습니다. 한 가게 건너 한 가게 수준이 아니라, 아예 거리 자체가 커피숍으로만 꽉 채워진 경우도 많습니다.

이래저래 자판기는 식음료 시장에서 뒤안길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판기 감성을 원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입니다. 바로 직장의 의사결정자들입니다. 얼마 전 SNS 상에서 ‘직장에서 필요 없는 인력’에 대한 풍자화가 인기를 끈 적이 있습니다. 대리부터 과장까지는 모든 업무를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필요 없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자가 보기에 이런 내용의 풍자화가 이슈가 된 데에는 스스로 생각할 힘이 없이 부하들에게 자판기식으로 아이디어를 뽑아 먹는 상사가 많다는 인식이 가장 큰 요인으로 보입니다. 리더 본인도 충분히 문제의식을 느끼고 조직 구성원들의 아젠다를 만들어 줄 입장이 됨에도 불구하고, 그조차 안하고 ‘한번 안을 가져와 봐라’고 말하는 것이죠.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많은 의사결정자들이 스스로 조직의 방향을 고민하고 전략을 짜는 사람이 아니라 ‘좋아’ 또는 ‘싫어’라고 선호만을 밝히는 이로 전락했다는 평가도 한몫 합니다. 조직의 위기가 내부에서 온 위기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직장 상사가 ‘자판기 감성’을 가졌다고 이렇게 많은 부하 직원들이 생각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iluvny23@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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