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사람들이 구토와 설사ㆍ저온증에 시달렸다. 1969년 8월27일, 전남 옥구군 실향민촌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틀 뒤 최초의 사망자가 나왔다. 발생 일주일이 지나서야 사태를 파악한 정부가 원인을 1차 발표한 9월3일, 감염자는 64명, 사망자는 11명으로 늘어났다. 군산과 고창ㆍ부안, 충남 서천까지 확산된 감염지역에서는 동남아를 휩쓸던 콜레라 공포에 떨었다. 정부가 밝힌 원인은 비브리오균에 의한 식중독. 보다 정확한 분석을 위해 이틀간 시간을 달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묵살한 채 보건사회부는 ‘콜레라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며 ‘예방조치를 취하면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의 장담과 달리 괴질은 전국적으로 퍼졌다. 들끓는 여론에 보사부는 ‘급성장염’이라고 둘러대다 감염자가 402명에 이른 9월9일에야 ‘신종 콜레라’라는 판명을 내렸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의무 보고해야 할 콜레라 발병을 보름 동안이나 몰랐던 한국은 국제적 망신을 샀다. 정부의 오판과 늑장 대응, 갈팡질팡 속에 1969년 콜레라는 10월24일 경북 울진에서 마지막 환자가 보고되기까지 1,538명이나 감염돼 137명이 사망하는 기록을 남겼다. 광복 직후 1만여명이 사망한 적이 있으나 건국 이후 최악의 피해다. 콜레라는 2003년 이후 국내에서 발견되지 않았지만 1969년은 오늘날과 닮은 꼴이다. 3선 개헌안의 별관 날치기 통과를 둘러싼 정쟁과 미디어법 공방, 콜레라와 신종플루로 단어가 바뀌었을 뿐이다. ‘초기 대응 미숙’마저 비슷하다. 당국의 안이한 대응 속에 신종플루 환자가 3,000명선을 넘어섰다. WHO 핵심 관계자의 ‘이론적 추정에 따르면 한국도 1,000만명이 감염돼 1만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경고가 오싹하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