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관계 맺기의 연속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과 부단히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어떤 만남은 서로 도움을 주는 좋은 인연으로 발전하는가 하면 안 좋은 인연이 돼 상처를 남기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반된 결과를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물론 상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자신의 행동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공직생활을 하다 보면 기업인을 만나 이런저런 부탁을 받을 수 있고 직장 상사로서 부하직원을 만나 애로를 들어줘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럴 때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연도 달라진다.
자신의 입장만 고수하면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없다. 경직된 자세로 무조건 안 만나 주면 상대방은 섭섭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대면의 기회조차 없으니 이런저런 오해가 생길 수 있고 무시당했다고 여길 수도 있다. 반면에 애로를 해결해주지는 못해도 만나서 얘기라도 들어주려는 자세는 좋은 인연을 만든다. 옳지 않거나 불법적인 방법을 제외하고 성의를 다하는 모습을 보이면 대개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좋은 인연을 만들려면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줄 알아야 한다. 실제로 기업인이 공무원을 만나 애로사항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한번 만나려면 여러 차례 고민을 할 것이다. 이런 입장을 고려한다면 마음을 열고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주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조직에서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상사 혹은 유관부서로서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라며 귀를 닫지 말고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주면서 안 되는 이유라도 설명해주려는 열린 마음이 요구된다. 그런데 원칙만을 앞세워 운영의 묘를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규정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운영하는 방식이 서툴러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사회는 제도와 인간으로 요약되는데 제도나 규정이라는 틀에 짓눌려 인간의 영역인 운영 면에서 제구실을 못하는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깝다. 좋은 인연은 자신이 세운 원칙을 지키는 동시에 상대방의 입장까지 배려할 때 생긴다. 인간관계론의 보고로 불리는 논어에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이 나온다. 군자는 그릇처럼 특정한 용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고집하거나 한쪽으로만 규정하지 말고 융통성을 발휘해 넓게 세상을 품으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삼십년이 넘는 공직생활에 이어 오늘의 나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이 무엇일까 돌아본다. 원칙을 중시하되 그것을 적용할 때는 늘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덕분에 좋은 인연이 많이 생겼고 그들의 응원 속에 적잖은 것을 이뤘다. 그러고 보니 인생에서 좋은 인연만큼 든든한 조력자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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