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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풍경을 그리는 영국 출신의 주목 받는 젊은 작가 윌 볼튼(38). 풍경을 시각적 그림으로 보여주는 보통 작가들과 달리 그는 청각적 소리로 표현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일반적인 풍경화(Landscape)와 다르게 음경화(Soundscapeㆍ音景畫)라 불린다. 하지만 소리를 만든다고 해서 음악가는 아니다. 음악인은 음악 그 자체를 위해 작업하지만 윌 볼튼은 "공간이 형성하는 여운이나 역사적 분위기, 기억 등의 관념을 소리로 변환시킨다"고 자신의 작업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의 해외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선정된 작가가 최근 방한했다. 그는 이달 말까지 국내에 머무르며 인천을 주제로 한 신작을 만든 다음 9월 15일 영국에서 개막하는 '리버풀비엔날레'에서 그 결과물을 선보일 예정이다.
11일 인천에서 만난 작가는 최근 며칠간 촬영한 사진들을 보여줬다. 오래된 옛 집의 허름한 벽, 쇠락한 항구 구석에 놓인 낡은 컨테이너, 배를 타고 들어갔던 백령도까지. 관광객의 기념사진이었다면 아름답고 화사했을 테지만 그의 사진은 달랐다.
볼튼은 "올해 리버풀비엔날레에서 선보일 인천에 관한 작품의 주제가 'Aerotropolice' 즉, 공항이나 항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공간에 관한 것"이라며 "사람이 사는 공간에는 역사와 문화가 있어야 하는데 일시적 주거공간인 공항이나 항구 같은 곳, 혹은 실제로는 존재하지만 정체성 없이 똑 같은 형태를 보여주는 쇼핑몰 같은 공간을 표현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그 같은 중간계의 공간으로 인천을 택한 작가는 "일상에서 버려진 공간, 우리가 소홀히 했던 풍경에서 소리를 찾아내 정체성 없는 공간의 숨은 정체성을 다른 방법으로 나타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윌 볼튼의 대표작으로는 앞서 2007년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의 의뢰를 받아 작업한 고성(古城) 옥스버그 홀의 작업 'Binary(이진법 데이터)'가 있다. 빅토리안 시대의 정취를 담고 있는 아름다운 성에서 그의 눈을 끈 것은 화려한 문양의 벽지였다. 그는 벽지 패턴을 악보에 올려 음악적 코드로 변환했고 그 시각적 형상을 소리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작품은 벽 옆에 악보와 함께 전시됐고 그 양쪽에 의자가 설치돼 관람객이 앉아서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함께 공감할 수 있게 했다.
한국과 관련된 윌 볼튼의 작업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진행한 '제주'가 있는데, 여기서는 제주의 풍경과 지역성을 보여주는 자연의 소리가 부각됐다. 또 한국의 궁중음악을 주제로 한 '비가(悲歌)'라는 작품은 궁중음악을 3초 정도 샘플링 한 다음 느리게 재생해 늘리고 또 반복 연주하는 방식으로 만든 20분짜리 작품이다. 작가는 "음악 안에 스며있던 숨 소리, 현의 떨림, 종의 울림까지 생생하게 포착해 낼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근대화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간직한 인천의 풍광이 우리 자신도 몰랐던 어떤 소리로 세계 미술계에 선보일지 기대하게 만드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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