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한 사람이 신발을 새로 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터에 갈 일이 있을 때 발에 맞는 새 신발을 사려고 마음먹었다. 잊어먹지 않으려고 미리 발 크기를 줄자로 재 뒀다. 어느 날 마침내 장에 갔다. 저쪽에 신발장수가 있는 것을 보고는 다가갔다. 신발을 고르던 중에 자신의 발 크기를 미리 잰 줄자를 집에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주인장, 내가 집에 잠깐 다녀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왜 그러십니까?" "아, 줄자를 깜빡 잊었소.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사려고 미리 재 둔 건데…." "아니, 이 답답한 양반아, 지금 바로 여기서 신어보면 될 거 아니오!" "아니오! 그 줄자가 꼭 필요하오." 2,000여년 전 한비자가 얘기한 일화다.
세상에 이렇게 답답하고 한심한 사람이 또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의외로 주변에 많다. 지금 기업에서는 혁신바람이 불고 있다. 차별화되고 독특한 제품을 만들지 않으면 시장에서 도태되고 만다. "자, 여러분 이제 우리는 혁신해야 합니다. 다들 뭔가 이전과는 다른 그 무엇을 생각해내기 바랍니다." 상사가 부하들에게 회의 때마다 외치는 귀에 익은 구호이자 요청사항이다. 그런데 막상 부하 직원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져오면 상사는 이렇게 말한다. "자네 그거 데이터가 있어? 데이터를 찾아오란 말일세!" 혁신적 아이디어는 문자 그대로 과거에는 없는 것이라서 데이터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도 어떤 아이디어를 내기만 하면 그것을 뒷받침할 데이터를 찾아오라 한다. 집에 두고 온 줄자를 가져와야지만 발에 맞는 신발을 고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상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다.
혁신한다는 것은 조직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혁신이라는 게 그만큼 아프고 힘든 일이다. 평소 알고 지내는 한 최고경영자(CEO)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그는 대학 선배가 오너로 있는 회사에서 경영자로 와달라는 간절한 요청을 받았다. "여보게, 우리 회사로 와서 회사를 좀 확 바꿔주게! 직원들이 관성에 빠져 안 되겠네! 자네가 좀 날 도와줘야겠어!" "형님, 그럼 제가 한 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1년 뒤 이 회사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 CEO는 회사에서 쫓겨났다.
이 CEO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제로베이스에서 점검했다. 그랬더니 잘못된 관행과 제도가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부분 문제점은 회사 오너가 과거 창업과정에서 성공적으로 도입했던 제도와 관행이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뒤집어나갔더니 누군가가 오너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새로 들어온 사장이 회장님의 업적을 깎아내리고 아끼던 사람들도 다 내보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너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쫓겨난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아끼는 후배에게 혁신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막상 자신의 업적을 하나둘 허물어 나가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던 것이다.
조직은 관성의 법칙을 충실하게 따른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데 데이터는 없다. 전임자가 한 일을 생각 없이 따라 하고 어제 한 일을 오늘도 반성 없이 반복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은 혁신에 실패한다. 그만큼 '집에 있는 줄자'의 위력은 강력하다. 혁신하면 오래된 제도의 중단으로 인한 불이익은 즉각 발생한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 도입에 따른 혜택은 즉각 발생하지 않는다. 이 기간 동안 조직원들의 불만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증폭된다. 이를 예상하지 못한 리더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부정적인 소리에 혁신을 포기하고 만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하는 경고다.
자신의 과거를 부정할 용기를 가진 자만이 혁신에 성공할 수 있다. 자신의 과거, 성공과 실패를 모두 잊어라. 자신의 줄자를 잊고 그냥 새 신발을 직접 신어 봐라.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