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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만 해도 한국 선수들을 안 좋게 보는 경향도 좀 있었지만 이제 많이 사라졌습니다." 지난 22일 일본 미야자키현에서 막 내린 일본프로골프투어(JGTO) 던롭 피닉스 토너먼트에 출전한 통산 3승의 베테랑 장익제(42)는 최근 일본골프계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42년 역사를 자랑하는 던롭 피닉스 토너먼트는 JGTO의 시즌 막바지에 열리는 특급대회 중 하나다. 상금 랭킹이 높은 84명만 나올 수 있는 대회임에도 올해 한국 선수 출전자는 20여명. 4분의1에 이른다. 내년에는 한국 선수의 진출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JGTO에서 통산 4승을 올린 김형성(35·현대자동차)은 "내년 JGTO에 오기 위해 퀄리파잉(Q)스쿨에 응시한 한국 선수가 100명이 넘고 한 지역의 Q스쿨 3차 예선에서는 참가자 35명 중 18명이 한국 선수였다"고 전했다. 이번 시즌 열린 36개 대회에서 한국 선수가 16승을 합작한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 투어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선수의 득세 속에 '눈칫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한다. 한국 등 외국에서 온 선수들은 '상금 사냥꾼'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곱지 않은 시선이나 시기의 눈초리가 존재했던 것도 사실. 하지만 최근 차별대우나 곱잖은 시선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됐다는 게 선수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여기에는 선수들의 '현지화' 노력이 한몫했다. 자선과 기부가 대표적이다. JGTO '일본파' 선수들은 3년 전부터 자선 프로암 골프대회를 열고 있다. 올여름 도쿄 인근에서 진행한 프로암에서는 150만엔(약 1,500만원) 넘는 돈이 모였다. JGTO에 전달하면 기부한 내역을 선수모임에 투명하게 공개한다. 투어 측이 요청하는 팬 사인회나 재능기부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맏형인 장익제는 지지난해부터 시간 나는 대로 원전사고로 아픔을 겪은 후쿠시마 지역의 학교를 직접 찾아가 어린 학생들에게 골프레슨을 하고 대안골프의 하나인 스내그(SNAG)골프를 함께 즐기며 모범을 보이고 있다.
일본 골프문화를 존중하고 그에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다. 선배들은 새롭게 진출하는 후배들에게 클럽하우스에서는 반드시 모자를 벗을 것, 복장은 단정히 할 것 같은 일본 내에서의 기본적인 행동규범에 관해 일러준다.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 하루빨리 그들의 문화를 따라야 경기력도 빠르게 향상시킬 수 있다는 걸 체험한 터다. 김형성은 "여기 오면 이곳의 언어도 잘해야 한다. 그런 노력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라고 조언했다.
실력은 기본이다. 골프뿐 아니라 일본스포츠계 스타로 떠오른 이보미(27)는 이미 JLPGA 투어 상금왕 등극을 확정한 데 이어 22일 시즌 7승째를 거두며 일본 남녀 투어를 통틀어 역대 최다상금 기록을 작성했다. 예쁜 외모와 갤러리를 대하는 친절함을 갖춘 이보미지만 경기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인기를 얻기는 어려웠다. JGTO의 김경태(29·신한금융그룹)도 시즌 5승을 올리며 상금왕 타이틀에 바짝 다가서 있다. TV의 골프채널이나 주요 전문지 등 골프 관련 매체에 한국 선수들의 레슨 코너가 실리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 됐다.
인간미와 정(情)도 일본인들의 마음을 열게 한 원동력이다. 이보미는 경기장 외에서 소탈한 모습으로 사랑받고 있다. 다이오제지 대회 때 후쿠시마 지역을 처음으로 찾은 이보미는 "(2011년 원전사고로) 여러 가지 일을 겪은 후쿠시마 분들에게 힘을 드리기 위해 좋은 플레이를 보여드리겠다"고 했고 우승으로 약속을 지켰다. 또 "장어덮밥 등 음식에 반해 더 달라고 부탁했다"는 말도 현지인들의 호감을 샀다.
분위기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한 선수는 연습그린에서 연습하는 자신을 향해 일부 일본 선수들이 의도적으로 어프로치 샷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중계 카메라가 일본 선수 위주로 잡는 일도 흔하다. 김경태는 "우리가 외국인인 이상 현지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고 많은 노력을 통해 지금 한국 선수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다"며 "젊은 선수들이 국내 무대에 안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애환이 있겠지만 꿈을 위해 더 큰 무대에 도전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미야자키=박민영기자 mypark@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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