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홍빛 살코기에 새하얀 지방이 적당히 어우러졌다. 검은 돼지의 속살이 총천연색 붉은색이라니. 아무리 얇게 썰어도 그냥 먹기엔 한국인 입맛에 다소 짜게 느껴지지만 빵이나 크래커에 얹어 와인 안주로 곁들이면 환상의 궁합을 자랑한다. 스페인 최고의 하몽 생산지 기후엘로에서 주로 생산되는 ‘하몽 이베리코’ 얘기다. 이베리코는 스페인산 흑돼지. 하몽(jamon)은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 오랜 기간 숙성한 스페인 전통 육가공품이다.
이탈리아의 프로슈토햄과 모양이 비슷한데 스페인 사람들 앞에서 이 둘을 비교했다간 큰 모욕을 줬다는 오해를 받기에 십상이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하몽은 ‘성스러운 음식’이다. 하몽 때문에 스페인에는 채식주의자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최고급 하몽은 다소 질긴 프로슈토와 비교하면 훨씬 부드럽고 식감도 좋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하몽 마니아들뿐만 아니라 스페인 요리의 정수를 체험하고 싶어하는 관광객들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차로 3시간 이상 걸리는 기후엘로를 찾는 이유는 전 세계 유일의 하몽 투어리즘(JamonTurismo)을 체험해보기 위해서다. 살라망카 지역의 작은 마을인 기후엘로는 하몽루트(Ruta de Jamon)로 유명한 곳으로 이 지역 대표 기업인 훌리안 마틴(Julian Martin)은 하몽투어리즘을 최초로 선보인 회사다.
보통의 투어는 ‘하몽 이베리코 데 베요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베요타는 스페인말로 도토리를 뜻한다. 도토리만 먹여 키우는 것은 아니지만 집중적으로 살을 찌우는 시기에 도토리나무가 있는 산에 흑돼지를 풀어놓고 도토리를 주워 먹도록 하는 데서 유래했다. 도토리를 주워 먹은 돼지의 살은 육질이 연해지는 동시에 맛이 달콤해진다.
도축 후에는 약 2주간 소금에 저린다. 공장에 들어선 돼지 다리는 이 때부터 중력을 거부해야 하는 운명에 처한다. 4년간 거꾸로 매달려 숙성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탓이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속에 자연풍을 맞으며 피부는 고동빛을 띠지만 속살은 피부를 방패 삼아 아기 살처럼 연해진다. 박테리아의 공격을 막기 위해 직원들이 일일이 돼지기름을 발라 품질을 유지한다.
크리스마스를 2주 남짓 앞둔 공장에는 출시를 앞둔 완제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전체 생산량의 30% 이상이 연말, 연초에 팔린다. 최고급 제품의 경우 1㎏에 30유로 이상 하는 고급음식(뼈 무게가 상당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살코기 값은 더욱 비싸진다)인 탓에 스페인 사람들도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하몽을 마음껏 즐기지 못한다.
올해는 물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루이스 미구엘 훌리안마틴 수출 담당 이사의 설명. 미구엘 이사는 “4년전 글로벌 금융 위기로 하몽 생산을 줄였는데 그 여파가 올해 나타나고 있다”며 “제조기간이 4년에 달하는 탓에 와인 못지않게 원료 수급에 따른 부담이 크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10년 전 하몽 투어리즘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경기 변동에 따른 위험이 크다 보니 축산·가공업에 관광·서비스업을 접목한 6차산업화를 통해 부가가치도 높이고 시장도 확대하기로 한 것. 미구엘 이사는 “하몽투어를 시작하면서 수출 국가가 5개국에서 35개국으로 늘었다”며 “현재는 연 4,000~5,000명이 꾸준히 방문하고 있고 다양한 관광 박람회에 참가해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행정보 : 마드리드에서 기후엘로(살라망카)까지 거리는 약 200km, 차로 3시간 걸린다. 시설을 둘러본 후 와인과 하몽 마에스타(장인)가 직접 썰어주는 최고급 하몽을 맛보는 미니투어는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오후 2시까지 있다. 가격은 성인 35유로, 12세 미만 어린이 15유로. 그룹투어는 언제든 가능하다. 성인 30유로, 12세 미만 15유로. 투어는 홈페이지(http://www.jamonturismo.es/)에서 예약할 수 있다.
/기후엘로(스페인)=글·영상편집 서은영기자 supia927@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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