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미국을 괴롭혀라"…‘북 치기 작전’





1942년 1월 13일 미국 동부 플로리다 앞바다. 9,000톤짜리 영국 군함 키클롭스 호가 독일 잠수함 U-123호가 발사한 어뢰에 맞아 가라앉았다. 피해는 연일 이어졌다. 1월 말까지 25척(15만 6,939톤)의 군함과 유조선, 상선이 침몰당했다.

갈수록 대담해진 독일 잠수함들은 1만톤급 이하 군함은 지나쳐 버리고 대형함정만 골라 어뢰를 쐈다. 제1의 목표는 화물선이나 유조선. 전쟁 수행능력을 떨어뜨리자는 의도였다. 미국은 적지 않게 놀랐다. 독일 잠수함들은 연합국의 북대서양 선단을 공격할 때도 호위용 미국 군함은 건드리지 않았던 터. 일본의 진주만 기습(1942년 12월 8일) 이후 독일과도 전쟁 상태에 들어간 뒤 독일 잠수함에 처음 당했으니 충격이 컸다.

독일이 미국 동부해안과 파나마 일대를 공포의 바다로 만든 목적은 생색용. 태평양 곳곳에 미국과 혈투를 벌이고 있는 동맹국 일본에 ‘성의’를 보이고 미국을 적당히 위협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지 말도록 경고하는 의도가 깔렸다. 동맹에는 성과를 떠벌리고 적군에게는 공포를 심어주자는 생각에서 잠수함대의 미국 연안 작전의 이름도 ‘북 치기 작전(Operation Drumbeat)’으로 지었다.

북 치기 작전에 독일이 동원한 잠수함은 달랑 5척. 기대 이상의 전과에도 단 한 척의 손실도 입지 않았다. 비결은 두 가지. 미국의 방심과 기술 혁신 덕분이었다. 인구가 많고 공업시설이 많은 동부지역 도시들의 휘황찬란한 조명은 야간에 항해하는 연합국 선박의 실루엣을 독일 잠수함의 잠망경에 고스란히 옮겨줬다.

대형 잠수함을 개조한 유조 잠수함(U-tanker)이 공급하는 기름과 어뢰로 작전 능력이 배가된 독일 잠수함들은 마치 앞마당처럼 미국 연안을 휘저었다. 작전에 들어간 지 6개월 동안 독일은 잠수함 7척과 승조원 302명을 상실하는 대신 연합국 선박 397척(약 200만 톤)의 격침 실적을 올렸다.

미국이 동부 연안지방에 한해 야간에 불빛을 끄거나 감추는 등화관제를 시행하고 야간을 운행하는 선박에도 호위함정을 딸려준 7월부터 독일 잠수함대는 미국 연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독일 해군 잠수함들은 미국 연안보다는 대서양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으나 북 치기 작전은 미국에 세 가지 영향을 남겼다.

첫째는 미국 동부의 전격적인 석유 배급제 시행. 전국 각지에서 펑펑 솟아나는 기름을 물쓰듯 사용하던 시대는 전쟁 이전의 ‘좋았던 시절’로 지나갔다. 두 번째 영향은 에너지 인프라의 확충. 유조선이 연안에서 잠수함에 당하는 사태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미국은 원유생산지인 중서부에서 정제시설이 집중된 동부에 이르는 초대형 장거리 송유관 2개 노선을 깔았다.

철도와 트럭 화물업자들의 반대를 뚫고 첫 삽을 뜬 송유관 공사는 전시동원체제의 효율성으로 불과 1년 만인 1943년 8월 14일 완공됐다. 텍사스에서 뉴저지까지 8개 주와 20개 강을 통과하는 총연장 2,018㎞짜리 송유관은 기술혁신의 개가였다. 무엇보다 파이프의 구경이 컸다. 이전보다 5배나 큰 24인치여서 ‘빅 인치(Big Inch)’라고 불린 새 송유관은 하루 30만 배럴의 원유를 실어 날랐다.



이듬해인 1944년에는 리틀 빅 인치(Little Big Inch)까지 완공됐다. 송유관 구경이 20인치로 작았을 뿐 총연장은 빅 인치보다 긴 2,373㎞에 달했던 리틀 빅 인치는 효율이 높았다. 유전지대에 신설된 정유공장에서 거른 정제유를 운송했기 때문이다. 빅 인치와 리틀 빅 인치는 미국 내 원유수송의 절반을 담당하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반짝 출몰했던 독일 잠수함대가 미국에 미친 세 번째 영향은 전시 군수물자 생산 극대화. 독일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며 미국은 연합국의 거대한 병참 기지로 거듭났다. 자동차의 왕국인 나라가 이때부터 종전까지 생산한 승용차가 단 37대에 불과했을 정도로 미국은 공업 능력을 무기를 생산하는 데 쏟았다. 미국 제조업은 전쟁 기간 중 전투용 함정 6,500여 척과 탱크 8만 6,330대, 항공기 29만 6,000여 대, 지프와 트럭 350만대, 1,200만 정의 소총과 기관총을 토해냈다.

연안을 포기하고 대서양으로 나가 통상 파괴전을 택한 독일 잠수함대의 생명도 오래가지 못했다. 호위선단이 강력해진데다 새로운 배가 쏟아져 나오는 통에 1943년 하반기 이후부터는 힘을 못 썼다. 미국은 피해가 심했던 1942년에도 독일 잠수함에 한 척이 격침 당하면 두 척꼴로 새로운 선박을 건조해냈다.

애초부터 독일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국내 총생산에서의 차이는 전쟁 내내 메꿀 도리가 없었다. 1942년 1 대 1.75였던 추축국과 연합국의 국내총생산이 종전 무렵에는 1 대 5.02로 벌어졌으니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독일,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대비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비에트 연방)의 GDP 규모 추이.



경제력과 제조업의 힘이 승리를 이끈 셈이다. 투키디데스는 2,400여 년 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이런 구절을 남겼다. ‘전쟁의 흐름을 결정하는 것은 약탈한 재산이 아니라 축적해놓은 자본의 힘이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