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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에] 단두대 그리고 백병전

단호한 표현 쏟아낸 대통령·관료

성과는 그에 못 미쳐 공허할 뿐 거친 발언보다 경청·설득이 먼저


#. 2014년 11월25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이른바 단두대론(論)을 펼쳤다. "암 덩어리 규제들이 여전히 요지부동"이라는 지적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정부 부처가 있어야 할 이유를 소명하지 못하는 규제는 단두대에 올려 일괄 폐지하는 '규제 기요틴(guillotine)제'를 확대해 규제 혁명을 이루겠다." 이 시점을 전후해 박 대통령의 발언과 행동이 이전과 눈에 띄게 달라졌다. '단두대'와 '암 덩어리' 외에도 '사생결단' '원수' '배신자' 등과 같은 극단적인 말을 쏟아냈다. 대통령의 동생인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이 "단어 선택이 굉장히 강하고 단호해졌다" "개인 박근혜나 국회의원 시절과 달리 거침없고 강한 표현을 쓴다"고 말했을 정도다. 박 전 이사장은 대통령의 변화에 대해 "좀 과격하다 싶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청와대·사회·국가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표현한 것"이라는 나름의 해석을 내놓았다.

#. 대통령의 단두대 발언이 나온 지 1년여가 지난 이달 13일. 경제 사령탑인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취임식에서 한 말이다. "기재부가 현장에 몸소 뛰어들어야 하고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백병전도 불사해야 한다." 소위 '백병전론'이다. 구조개혁이라는 백병전의 성공을 위해 자신이 직접 장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면서 그는 '징비(懲毖·잘못과 비리를 경계해 삼간다)' '분투(奮鬪·있는 힘을 다해 싸우거나 노력한다)' 같은 전투 용어를 가감 없이 썼다. 평소의 '순둥이' 이미지와는 확 달라진 모습이어서 투사·파이터로의 변신을 선언했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의외였다.

"말하는 것을 들으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입니다. 마음이 말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잔잔하면 말도 잔잔하고 마음이 거칠면 말도 거칩니다. 좋은 마음이 좋은 말을 하고 좋은 말은 좋은 그림을 그립니다." 서양 격언에도 나오듯이 예로부터 '말은 마음의 그림(speech is the picture of the mind)'이라고 했다. 마음이 거칠어진 탓일까. 언제부터인가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관료 할 것 없이 말들이 격해졌다. 자신이나 국민을 향한 다짐 수준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사회나 국가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수사(修辭)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나' 하고 놀랄 정도의 과한 표현이 잦아졌다. 어떤 말은 일방통행식 명령·지시의 불편함을 넘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거칠고 단호한 용어를 사용한다고 뜻이 제대로 전달되고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릴까. 단두대론 후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그렇지 않은 듯하다. 산업 현장에서는 대못·중복 규제가 여전하다고 아우성이고 경제 여건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취임 후 첫 현장 방문지로 경기 평택항을 찾았더니 수출을 가로막는 규제를 완화해달라는 건의가 쏟아졌다고 한다. 역직구 활성화 등 수출 대책이 현실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간 정부가 쏟아낸 말의 성찬에 비해 성과가 미흡하다고 평가해도 될 것 같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단두대나 백병전이 지금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다. 짐이 없는 수레는 굴러갈 때 덜컹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나는 것이 보통이다. 인간도 수레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실 없는 사람들이 부족함을 숨기려고 목소리나 행동을 과장해 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확신에 찬 어투로 단정 지어 말할수록 신뢰성이 떨어지고 실속이 없을 공산이 크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당장 필요한 것은 전투적이고 감정 섞인 말이 아니라 국민·기업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청하고 설득하는 자세다. 그것이 바로 소통이고 그래야 빈 수레가 채워진다.

임석훈 논설위원 shim@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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