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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오랜 시간을 겹겹이 쌓인 땅의 힘에 바탕을 둔 포도를 수확해 인간의 지혜로 숙성시킨 것이고, 예술 역시 자연이 가진 재료를 기본으로 작가의 생각을 숙성시켜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죠. 다른 차원으로의 변화를 이루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여운을 준다는 점에서 와인과 예술의 결합은 필연적입니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80) 화백이 프랑스산 고급 와인 '샤또 무똥 로칠드 2013'의 라벨 작업에 참여한 소감을 이같이 밝혔다. 160여년 전통의 '샤또 무똥 로칠드'는 1945년 세계 대전 후 평화를 축하하기 위해 빈티지의 라벨을 젊은 화가 필립 줄리앙에 의뢰해 승리의 'V'로 장식한 후 매년 유명 화가에게 라벨을 맡기고 있다. 살바도르 달리, 헨리 무어, 후안 미로, 마르크 샤갈, 바실리 칸딘스키,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키스 해링, 프란시스 베이컨, 제프 쿤스 등 세계 최고의 작가들이 샤또 무똥 로칠드의 라벨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한국인은 이우환이 처음으로 그가 세계적 거장 반열에 올라있음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순간이다.
28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샤또 무똥 로칠드 2013'의 라벨 원화 공개행사에 참석한 이 화백은 "좋은 와인은 얼과 혼을 울리는데, 예술도 그렇다"고 덧붙였다. 샤또 무똥 로칠드의 소유주인 줄리앙 드 보마르셰 드 로칠드는 "파리 베르사유 전시(2014년)에서 본 이 화백의 작품에 감명을 받고 작품을 의뢰했다"며 "처음에는 포도가 자라나는 토양을 떠올리게 하는 오렌지색 작품을 골랐는데 나중에 작가가 다시 그리겠다고 해 와인색의 지금 작품으로 바꿨다"고 말했다.
이 화백은 "대단히 성숙한 귀부인의 화려하고도 고귀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하다 "어렵고도 품위있고 숙성된 색깔이 바람직하겠다 싶어 (물감 튜브를) 짜면 나오는 자주색이 아니라 고심 끝에 여러가지 색을 섞어 와인빛 자주색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푸른색 시리즈로 유명한 이 화백이 와인색으로 그린 작품은 이것이 유일하다. 그는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바탕의 호응, 공(空)에서 오는 바이브레이션(울림)"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부연했다.
"하루도 와인 없이는 식사가 안되는 상태"라며 와인에 대한 찬사를 쏟아낸 이 화백은 그러나 최근 불거진 '위작 유통' 논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와 관련한 질문에 그는 "그 건에 대해선 일체 답하지 않겠다"며 "변호사와 상의하시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조상인기자 ccsi@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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