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방문 중인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20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경제와 정치·군사·민간 등 각 분야에서 적극적인 협력에 나서겠다고 밝히며 중국과의 신(新)밀월시대를 선언했다.
전 정권인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 시절 남중국해 영유권을 놓고 국제재판소에 중재를 요청하며 극한대립으로 치달았던 양국관계가 두테르테 대통령 취임 100여일 만에 이뤄진 중국 방문으로 대전환을 맞는 모습이다.
지난 6월 말 취임한 두테르테 대통령은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싼 중국과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전통의 우방 미국을 제치고 중국부터 찾았다.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이날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은 “양국관계가 그동안 비바람을 겪기는 했지만 우호관계와 협력 의지는 변하지 않았다”면서 “어려운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해 적절히 분쟁을 처리하자”고 말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양국은 협력을 통한 성장 잠재력이 크다”며 “경제교역과 인프라 투자 등 다양한 방면에서 협력을 추진하자”고 화답했다. 정상회담 이후 양국은 경제와 마약퇴치 등 13개 방면에서 협력 문건을 체결했다. AP통신은 “양국이 남중국해 문제 해결을 위한 양자회담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면서 “중국이 지속적으로 남중국해 문제 해결 방법으로 요구해온 양자회담이 이번 회담을 계기로 물꼬를 튼 것은 중국 측에 큰 성과”라고 전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과 별도로 이날 리커창 총리, 중국 서열 3위인 장더장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과도 양자회동을 했으며 장가오리 부총리와 함께 양국 경제포럼에도 참석했다.
외신들은 남중국해 분쟁의 당사자인 필리핀이 중국에 적극적인 구애의 손길을 뻗치면서 아시아태평양에서 중국의 패권 야심을 견제하려던 미국의 전략이 암초에 부딪치게 됐다고 평가했다. 7월 국제중재재판소(PCA)가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이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으로 오히려 친중노선을 가속화할 경우 아시아 회귀정책을 통해 대중 포위망을 구축하려는 미국의 남중국해 전략에 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양국 정상회담은 워싱턴과 마닐라의 오랜 전략적 동맹관계를 허물어뜨릴 수 있는 상징적 사건이 될 수 있다”면서 “중국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는 미국의 노력에 큰 타격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국은 지금까지 남중국해 안보전략에서 일본·필리핀·베트남과 군사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국을 견제해왔는데 두테르테 대통령이 이 대열의 이탈을 선언하면서 미국은 필리핀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난제에 빠졌다.
실제로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번 방중 직전 기자간담회에서 “중국 무기를 구매할 의사도 있다”며 “미국과는 더 이상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전날 베이징의 필리핀 교민과 만난 자리에서는 “이제 미국과 작별할 시간”이라고도 말했다.
다만 외교가에서는 전통적 친미정서가 뿌리 깊게 박힌 필리핀이 미국과의 동맹을 크게 훼손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 이후 친중반미 행보를 강화하고는 있지만 실리외교에 방점을 둔 만큼 중국과의 밀월관계는 미국과의 관계 재설정을 겨냥한 포석이라는 분석이다. 18일 중국을 방문한 두테르테 대통령은 3박4일의 일정을 마치고 21일 귀국길에 오른다. /베이징=홍병문특파원 hb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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