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중은행의 A부행장은 이번 설 연휴에 오랜 친분이 있는 고객들에게 선물 대신 감사의 문자를 보냈다. 그동안 명절 때마다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에서 선물을 보냈지만 이번 설에는 건전영업을 강화한 은행법 때문에 선물을 보내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A부행장은 “안 주고 안 받는 사회 분위기를 따라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시중은행의 영업 풍속도가 바뀌고 있다. 설·추석 등 명절은 고객과 친분을 강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기인 만큼 영업직원들은 선물 목록까지 꼼꼼히 점검하고는 했다. 하지만 올 설에는 VIP 고객에게조차 감사 인사로 갈음하는 영업직원이 대폭 늘었다. 식사 역시 마찬가지다. 시중은행의 주요 프라이빗뱅커(PB)들은 최근 고액자산가를 만날 때도 호텔 레스토랑 대신 대중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일부 영업점 직원들은 고객과 식사 횟수조차 줄이고 있다고 귀띔하는 상황이다.
시중은행의 영업 풍속도가 바뀐 것은 건전영업을 강화한 은행법 여파 때문으로 보인다. 은행원들은 공무원, 사립교원, 언론사 임직원과 달리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 일명김영란법)’ 적용을 받지 않지만 지난해 7월부터 개정된 은행법을 적용받고 있다. 은행법 개정안은 은행 임직원들이 고객들에게 정상적인 수준을 초과해 재산상 이익을 제공하는 등 불건전 영업행위를 하지 않도록 내부통제를 강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시중은행 임직원들은 이로 인해 식사·선물 3만원, 경조사비 20만원을 초과해 영업행위를 할 경우 구체적인 고객정보를 기입해 은행 준법감시인에게 보고해야 한다. 한 시중은행 PB는 이와 관련해 “아무리 고액자산가와의 식사라 하더라도 본점에 보고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은행법이 바뀐 후 고객과 3만원을 초과하는 식사를 한 적이 없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은행 영업현장에 나타난 신(新)풍속도가 공정한 경쟁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은행지점 간 고액선물 등으로 자산가를 유치하려는 경쟁이 치열했는데 은행법이 바뀐 후 건전영업이 강화된 측면이 있다”며 “과도한 영업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내수침체 등 국가적 측면에서는 상당한 후유증이 우려된다. 가뜩이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청탁금지법 여파 등으로 소비절벽이 발생하고 있는데 은행법까지 소비심리를 더 위축시켰다는 것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영업현장에서 고액자산가들에게 저렴한 설 선물을 보내느니 아예 안 보내고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며 “지갑을 열어야 하는 곳에서조차 지갑을 닫아 버리니 소비경기에는 분명히 부정적인 영향이 발생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동효기자 kdhy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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