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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석의 영화 속 그곳] 시간을 거슬러 첫사랑의 추억속으로…"넌 어떻게 지내니?"

⑥교토 '만남의 다리'-'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게이한선 주쇼지마역서 걸어서 10분

주인공 남녀 사랑 키운 등하굣길 다리

강가 산책로 따라 봄이면 '벚꽃' 만개

기온거리엔 첫 데이트 디저트 카페도

입구부터 영화포스터·스틸컷으로 단장





사람의 수명이 그렇듯 영화의 생명력도 저마다 다르다. 극장 상영이 끝나기 무섭게 자취를 감추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어떤 영화는 오래도록 살아남아 세대를 가로지르는 관객층을 형성한다. 이와이 슌지의 대표작인 ‘러브레터’는 분명 후자에 속하는 작품이다. 비슷한 장르의 이야기를 구상하는 일본의 후배 감독들은 하나같이 본받고 따르면서 동시에 극복해야 할 좌표가 되는 작품으로 ‘러브레터’를 꼽는다. 표백제를 넣은 빨래처럼 깨끗한 화면과 맑은 정서를 지닌 이 영화는 개봉 후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까지 일본 감성 멜로의 모범사례로 거론되며 변함없는 영향력을 뽐내고 있다.

쓰키카와 쇼 감독이 연출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7년)’도 ‘러브레터’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든 영화다. 학교 도서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10대 소년·소녀의 사랑부터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구성까지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영화 곳곳에 ‘러브레터’를 향한 오마주를 심어놓은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촬영지는 일본 간사이 지방의 교토에 가면 둘러볼 수 있다. 게이한선 주쇼지마역에서 내린 뒤 골목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주인공 남녀의 등하굣길이자 영화 후반부에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인 ‘만남의 다리’가 보인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고등학생인 사쿠라(하마베 미나미)는 사교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물이다. 그런 소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소년은 교실 한구석에서 조용히 책만 읽는 외톨이인 하루키(기타무라 다쿠미).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서툰 하루키는 처음에는 사쿠라의 구애를 멀리하지만 차츰 마음의 빗장을 열면서 가슴 시린 첫사랑을 경험한다.

교토 주민들이 주쇼지마역 인근에 위치한 ‘만남의 다리’를 지나고 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 등장한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다리 위에서 교복을 입고 오가는 학생들의 앳된 얼굴을 마주하면 영화 속 장면들이 차르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필름처럼 뇌리를 스친다. 다리 아래로는 주민과 여행객을 위한 산책로가 자리하고 양옆에는 호리카와 강이 속 깊고 차분한 하루키의 성격을 닮은 듯 느릿느릿 흘러간다. Y자 형태로 만들어진 이 다리를 이리저리 서성이다 보면 만났다가 헤어지고, 이별했다가 재회하는 우리네 삶이 다리 모양과 닮아 있다는 생각도 슬며시 솟는다. 물론 지금은 추운 겨울이니까 영화에서 우리의 눈을 호강시켰던 분홍빛 벚꽃을 구경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꽃이 모두 지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았다고 해서 영화가 남긴 여운이 사그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쿠라의 대사처럼 꽃잎이 다 떨어진 것처럼 보여도 실은 싹을 품고 잠들어 있는 것이니까. 그렇게 숨어 있다가 다시 봄이 오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듯 단숨에 꽃을 피울 테니까.

하루키와 사쿠라가 첫 데이트를 했던 ‘스위트 파라다이스(시조 가와라마치점)’는 교토의 명소인 기온거리 인근에 자리한다. 게이한선 기온시조역에서 내려 다리 하나만 건너면 나오는 스위트 파라다이스는 케이크와 음료, 아이스크림과 과일 등을 뷔페식으로 즐길 수 있는 디저트 카페다. 굵은 띠를 돌돌 말아놓은 듯한 천장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고 카페 입구는 영화 포스터와 스틸컷으로 꾸며져 있다.



교토 기온시조역 근처에 있는 디저트 카페인 ‘스위트 파라다이스’ 입구에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만남의 다리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다시 등장한다. 사쿠라는 하루키와 수줍게 사랑을 키워갔던 이곳에서 예상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세상과 작별한다. 세월이 흘러 하루키는 모교에 선생님으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사쿠라를 떠나보내고 삶의 의미도 함께 잃어버린 그는 책상 서랍에 사직서를 넣어두고 매일 아침 꺼내보며 한숨짓는다. 이처럼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버티던 하루키는 학교의 도서관 철거 작업을 맡아 책을 정리하다 사쿠라가 죽기 전 남겨놓은 비밀의 편지를 발견한다. 영화의 핵심 소품 가운데 하나인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는 “아저씨의 슬픔이 사라지면 나를 안 것을 기쁘게 생각하게 될 거예요”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루키는 뒤늦게 첫사랑이 숨기고 떠난 편지를 읽으며 깨닫는다. 남과 더불어 사는 일의 소중함을 가르쳐준 사쿠라를 만난 것은 슬픔이 아닌 축복이었음을. 아름다운 추억만큼 힘겨운 삶을 이겨내게 하는 버팀목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이 깨달음과 함께 하루키가 사직서를 미련없이 찢어버리는 순간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는 희망이 스민 성장 드라마로 바뀌고 관객의 얼굴에는 눈물 대신 미소가 번진다. /글·사진(교토)=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취재협조:일본정부관광국(JNTO)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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