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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백남준을 만나다]소꿉친구·첫사랑·예술적 동지…거장 예술혼 깨운 뮤즈들

<14>백남준과 그의 여인들

백남준과 그의 예술적 동반자였던 첼리스트 샬롯 무어맨이 백남준의 몸을 악기 삼아 ‘인간 첼로’를 공연하고 있다. 1982년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의 모습이다. /사진제공=임영균




백남준의 ‘TV첼로’가 1982년 휘트니미술관 회고전에 전시중이다. 비디오 영상 속 인물은 작가의 예술적 동지였던 샬롯 무어맨이다. /사진제공=임영균


젊은 시절의 백남준 사진을 보면 시쳇말로 ‘꽃미남’이다. 턱선이 날렵하고 이목구비는 또렷하며 얼굴 곳곳에서 영민함이 드러난다.

백남준은 35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1984년의 귀국 기자회견장에서 누가 보고 싶냐는 질문에 “유치원 친구 이경희가 보고 싶다”고 했다. 어릴 적 서울에서 한 손에 꼽히는 부잣집의 막내 아들이던 백남준은 당시 상류층 부인들의 모임인 ‘애국부인회’가 경영한 애국유치원에 다녔다. 이경희는 그때 같이 다닌 동갑내기 친구였다. 수필가이기도 한 이경희 씨는 1984년 당시 방송 인터뷰로 본 코흘리개 적 친구 백남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수소문해 백남준이 묵고 있는 워커힐 호텔로 찾아가 재회했다. 이경희를 본 백남준의 첫 마디는 “세라비(C’est la vie·이게 인생이지), 우린 너무 늦게 만났어”였다. 이경희 씨는 옛날 사진을 꺼내 보여줬고 ‘남준은 왕자, 경희는 공주’라며 소꿉놀이하던 옛 추억을 떠올렸다. 이 씨는 백남준 사후에도 그와 관련된 일에 늘 발 벗고 나섰고, 친구와의 추억을 책으로 남겼으며, 고령인 지금도 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에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

백남준은 1952년 봄,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대만큼이나 들어가기 어렵다는 동경대 교양학부에 입학했다. 2학년이던 해에 같은 대학 불문과 학생이던 시부사와 미치코라는 여성을 알게 됐고 짝사랑이 시작됐다.

훗날 그가 보여준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달리 여자 앞에서 백남준은 늘 수줍었고 항상 얼굴을 붉혔다. 어떻게 마음을 전하나 속을 태우던 백남준은 당시로서는 구하기도 어렵고 값도 비싼 부다페스트 현악 4중주 공연 티켓을 선물로 건넸다. 표를 내밀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건만 운명은 얄궂었다. 미치코에게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표를 돌려주러 백남준의 집 주소를 알아내 찾아갔다. 그 시절 동경의 최고급 주택가에 산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다. 백남준은 형들과 부촌에 살았지만 옷차림은 늘 허름했다. 연주회에 꼭 같이 가고 싶다는 백남준의 말에 미치코의 냉랭함이 조금 누그러졌다. 함께 연주를 감상하고 공연 후 차도 같이 마셨지만 데이트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다.

인형처럼 예뻤다는 그녀는 자신의 애인에게로 돌아갔다. 스무 살의 첫사랑은 대부분이 그렇듯 풋사랑으로 끝났다. 백남준은 대학 3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면서 상과를 바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미학·미술사학과로 진학했고 1956년 졸업 후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미치코는 나중에 콜롬비아대에 다녔고 뉴욕에 살던 백남준은 ‘미치코의 친구의 친구’를 통해 스치듯 그녀가 자신의 얘기를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누나들의 피아노 수업을 어깨너머로 배워 건반을 두드리던 백남준은 미술에 앞서 음악에 대한 재능을 먼저 드러냈다. 독일로 간 그는 뮌헨대학에서 음악학과 미술사를 공부했고, 이어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1958년 쾰른대학에 입학한 것을 계기로 작곡과 오디오 테이프, 로봇 등 예술과 기술을 결합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곳에서 새로운 여인을 만났다.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라는 독일 여성이다. 백남준은 1959년에 갤러리22에서 ‘존 케이지를 위한 오마주’ 전시에서 생애 첫 피아노 부수기 퍼포먼스를 한 후 본격적인 행위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바우어마이스터도 백남준 같은 ‘전위적인 예술가’였다. 독일 생활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백남준을 극진하게 도와주며 둘은 ‘예술적 파트너’가 됐다. 1960년 10월에 쾰른에서 벌인 백남준의 대표적 퍼포먼스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가 바로 바우어마이스터의 작업실에서 선보였다.

그곳에서 백남준은 고가의 피아노를 2대나 때려 부쉈다. 관람객의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가위로 잘랐고 예고 없이 사람들의 머리를 샴푸로 적셨다. 이 같은 기행은 백남준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백남준은 1962년에 처음 미국에 갈 때도 바우어마이스터와 동행했지만 그녀는 1970년대에 독일로 돌아갔다.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가 주최한 국제세미나에 참석한 그는 “우리는 젊은 시절에 만났다. 그는 대단한 사상가였고 철학자였고 음악가였으며 예술가이자 장인이고 행위예술가였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선한 사람이었다. 일말의 타락도 없었다”고 백남준을 회고했다.

‘백남준의 여자’로 부인인 구보다 시게코 여사보다 더 많이 언급되는 이는 첼리스트 샬롯 무어맨(1933~1991)이다. 유대인으로 미국 아칸소 주 리틀록 출신인 무어맨은 10살 때부터 첼로를 시작했다. 훤칠한 키에 길고 탐스러운 갈색 머리를 휘날리는 미인으로 줄리어드 음악대학에서도 눈에 띄는 재원이었다. 그는 백남준처럼 클래식으로 음악을 시작했음에도 전위예술에 심취했다. 특히 1963년부터 1980년까지 거의 매년 열린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을 이끌어 더욱 유명했다. 무어맨은 1964년의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백남준을 출연시키려 했고, 이에 뉴욕 JFK공항에 도착한 백남준을 직접 맞으러 나가기도 했다. 어쩌면 뉴욕에 스치듯 들른 백남준을 주저앉게 만든 이 중 하나가 무어맨이었을 것이다.



백남준과 첼리스트 샬롯 무어맨이 1986년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작품에 관해 의논하고 있다. /사진제공=임영균


같이 공연하면서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술활동으로만 보면 오히려 그들이 더 부부 같은 ‘찰떡 궁합’이었다. 1965년에 이들은 베를린으로 플럭서스 공연을 떠났다. 그해 봄 백남준은 원격 조정장치로 움직이고 소리도 내게 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었다. 이 로봇을 데리고 베를린 장벽의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로봇 오페라’를 공연하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그때만 해도 분단 독일의 베를린 장벽은 오늘날의 판문점 이상으로 냉기 도는 곳이었다. 시끌벅적한 예술가들이 기계 덩어리를 앞세워 찾아오니 지역 경비를 맡은 군인들이 공연 자체를 금지시켰다. 그래서 백남준과 무어맨은 서베를린의 상징인 빌헬름 황제 기념교회 근처로 자리를 옮겨 퍼포먼스를 이어갔다. 무어맨의 첼로 연주에 맞춰 로봇이 노래하고 백남준은 군중들을 향해 선언문을 배포했다.

“아리아가 있는 오페라는 시시하다/ 아리아가 없는 오페라는 지루하다/ 카라얀은 너무 바쁘다/ 칼라스는 너무 시끄럽다/ 선(禪)은 너무 힘에 겹다/ 백남준은 너무 유명하다/ 마약은 너무 지루하다/ 섹스는 너무 시시하다.”

‘대중예술을 죽여라(Kill Pop Art)’라는 글은 이 ‘로봇 오페라’의 노랫말처럼 퍼져 나갔다. 이후로 백남준은 무어맨과 함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를 전개한다. 문학과 미술이 성(性)을 소재로 삼는데 음악이라고 왜 안 되느냐는 것이 백남준이 품은 의문이었다. 백남준과 함께 작업하면서 무어맨은 때로는 찬물을 뒤집어 썼고 드레스를 입은 채 물통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상반신 노출도 불사했다. 1967년 뉴욕 공연에서는 상의 탈의에 이어 하의까지 벗으려다 두 사람이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이들은 외설죄, 음란죄로 재판까지 받았다.

백남준은 뮤즈 같은 무어맨에게 영감을 얻어 ‘TV첼로’ ‘TV브라’ 등의 작품을 제작했다. 말년에 무어맨이 병으로 누워만 있게 되자 그녀를 생각하며 ‘TV침대’도 만들었다. 그렇게 예술적으로 자극했던 무어맨이 여성으로서 백남준을 자극했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알려진 게 없다. 아마도 둘 다 짝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여러 사람들이 “무어맨과 무슨 사이였냐”고 캐려 들었지만 백남준은 그때마다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무어맨이 세상을 떠난 후인 1990년대의 어느 날 백남준과 아주 가까웠던 정기용 원화랑 대표가 다시 한번 물었을 때는 “정말 좋아했었다”는 대답을 들어냈다고 전한다.

비틀즈의 멤버 존 레넌의 부인으로 유명한 오노 요코(86)도 백남준과 가깝게 지냈다. 오노 요코는 무어맨과 같은 아파트를 쓰는 룸메이트였다. 1960~70년대는 뉴욕 못지않게 일본도 아방가르드 예술로 뜨거웠다. 독일의 전위적 음악가 존 케이지는 일본에서도 환영받았다. 이후 요코를 비롯해 백남준의 아내가 된 시게코, ‘물방울 무늬 그림’으로 유명한 쿠사마 야요이 등이 일본계 여성 예술가들이 뉴욕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활동하며 기발한 퍼포먼스를 벌이곤 했다. 요코가 존 레넌과 결혼하기 전의 첫 남편은 토시 이츠야나기라는 일본인 음악가였다. 하지만 워낙 매력적이었기에 백남준과 요코의 관계는 야릇했던 모양이다. 백남준의 아내 시게코는 나이가 들어서까지 늘 그녀를 ‘경계’했다. 1969년을 전후로 오노 요코는 존 레넌과, 샬럿 무어맨은 이탈리아계 남자와 결혼했고 공교롭게도 그 시기 백남준은 뉴욕을 떠나 1년 가량 캘리포니아의 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백남준(왼쪽)과 그의 일본인 아내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인 구보다 시게코. /서울경제DB


시게코는 결혼 후에도 요코만 보면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했는데, 1996년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는 조금 누그러졌다. 2000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백남준의 회고전이 열렸다. 개막식에서 백남준 부부와 마주친 요코는 시게코와 눈이 마주치고는 움찔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시게코는 여유를 보였고 요코에게 전시 축사까지 부탁했다. 요코는 연거푸 “나? 정말 나?”라며 되물을 정도였다.

한평생 나비처럼 날아가 버릴 듯하던 백남준이 반신불수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자 그제서야 아내 시게코는 너그러운 마음이 생겼던 모양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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