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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팀 24/7] 도난보물 못찾으면 '미완'…'덫' 놓고 피말리는 밀당

■문화재 사범 단속의 세계

"만국전도 살 재력가 있으니 일단 확인부터…" 유인

확실한 단서 없이 수사착수 태반

작전 수시 변경에 무작정 미행

수개월 매달려도 허탕치기 일쑤

은닉범 눈치채면 작전도 물거품

고도의 심리전으로 회수 힘써

본범잡기엔 짧은 공소시효 문제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원들이 회수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008호인 ‘만국전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서울청 지수대는 지난 5월 양녕대군 친필목판인 ‘숭례문’ 등 문화재 120여점을 장물이라는 것을 알고도 숨긴 혐의로 2명을 검거했다. /연합뉴스


“만국전도(萬國全圖)에 관심을 가지는 재력 있는 회장님이 있습니다. 일단 확인만 시켜주십시오.”

도난당한 보물 제1008호 만국전도가 유통된다는 첩보를 입수한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수사팀은 피의자가 판매를 위탁했다는 유통업자를 포섭한 뒤 그를 가장해 피의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압수수색영장 없이 첩보 하나에 의지해 경북 안동까지 먼 길을 내려온 수사팀으로서는 당장 되찾지는 못할지언정 진품 여부라도 우선 확인해야 했다. 스피커폰으로 켜놓은 유통업자의 휴대폰 주위에 둘러앉은 문화재청 단속반원과 경찰은 피의자가 덫에 걸려들기만을 기다렸지만 피의자가 눈치를 챈 탓에 해당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경찰은 이후 2시간 동안 네 차례나 작전계획을 수정했지만 피의자의 용의주도함에 별 소득 없이 물러나야 했다.

지난 5월 서울청 지수대는 문화재청 사범단속반과 공조해 만국전도와 함양 박씨 문중의 고서적 116책, 양녕대군의 필체를 엿볼 수 있는 ‘숭례문(崇禮門)’과 ‘후적벽부(後赤壁賦)’ 등 목판 6점을 회수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1993년 9월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도난당한 만국전도는 현존하는 필사본 세계지도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피의자는 만국전도를 비롯해 함양 박씨 문중의 고서적을 자신이 운영하던 식당과 자택에 은닉·보관해왔다. 이들 문화재가 도난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취득한 피의자는 경제적으로 어렵자 경매업자를 통해 처분·유통하려 했고 첩보를 인수한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이 경찰과의 공조로 검거한 것이다. 만국전도는 보물로 지정될 만큼 높은 가치를 가진 문화재지만 수사는 고작 사진 한 장을 손에 쥔 채 시작됐다. 경찰과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원들은 경북 안동과 충북 충주 등지를 오가며 수차례 헛물을 켜는 등 수개월간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끝에 간신히 문화재 위치를 확인, 피의자를 검거하고 회수할 수 있었다. 서울청 지수대 문화재 전문수사관들의 수사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지난 7월 18일 압수한 도자기들의 진위 여부를 감정하고 있다. 해당 문화재들은 신안군 증도면 앞 바다에서 해저 도굴된 것들로 중국 송원시대 때 중국인들이 일본으로 실고 가다 침몰된 것으로 추정된다./문화재청


◇‘무에서 유를 창조’…험난한 문화재 사범 수사=만국전도의 사례에서 보듯이 도난 문화재 수사 과정은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확실한 단서를 확보한 채 수사에 착수하는 경우가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도난 문화재 전문 수사관들은 문화재 수사가 사실상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라는 데 공감했다. 만국전도 회수과정도 마찬가지였다.

만국전도는 시행착오 끝에 문화재를 찾아낸 경우지만 이와 달리 실패를 거듭하고도 회수하지 못한 일 또한 허다하다. 2007년 추운 겨울 문화재청과 경찰은 전북 군산의 한 해역에서 불법 해저도굴이 자행될 것이라는 제보 하나를 달랑 받아들고 무작정 현장으로 출동했다. 수사팀은 현장에 내려가 제보자의 이야기를 추가로 듣고 용의자를 3박4일간 미행하기도 했지만 허탕을 칠 수밖에 없었다. 박병호 서울청 지수대 문화재전문수사관은 “해저도굴은 통상 사전작업 후 일어나기에 실제 도굴할 때를 맞춰야 한다”며 “당시 정보가 제한적이다 보니 정확한 도굴 시점을 특정할 수 없어 추운 겨울에 고생만 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고 회고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 대원이 도난당한 문화재임을 알고도 은닉해온 범죄자로부터 회수한 양녕대군 친필목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도난 문화재 수사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피의자와의 ‘밀당’이다. 보통 수사와 달리 문화재 수사는 범죄자 검거·처벌은 물론 문화재를 안전하게 회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범죄자를 검거하더라도 도난 문화재를 찾지 못하면 ‘반쪽짜리 수사’에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상진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장은 “일반범죄 수사의 경우 피의자가 입을 열지 않으면 열지 않는 대로 수사를 풀어나갈 수 있지만 문화재 수사의 경우 피의자를 실토하게 해 문화재를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며 “문화재 수사는 피의자의 입을 열기 위한 밀당과 회유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양녕대군의 숭례문 친필목판을 되찾는 과정도 이 같은 밀당의 연속이었다. 안동으로 내려간 수사팀은 피의자 주거지에서 예기치 않게 또 다른 문화재인 함양 박씨 문중의 고서적 수십 책을 발견했다. 수사팀은 이를 토대로 피의자를 압박했다. “골동품 매매상이면서 이 서적들을 모를 리가 없지 않느냐” “거짓말하지 않고 지금이라도 솔직히 말하면 선처가 가능하다”는 등 수 차례 피의자를 회유하고 압박한 끝에 수사팀은 문화재가 은닉된 장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본범 잡기에는 짧은 공소시효…범죄 재발로 이어져=천신만고 끝에 문화재 은닉범을 검거해도 처음 훔친 본범까지 잡아들이는 경우는 드물다고 전문 수사관들은 말한다. 도난당한 문화재는 사라진 후 길게는 수십년에 육박하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유통시장에 나타나는 게 보통인데 그때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절도범이 직접 유통에 나서기보다 시장에 나오기까지 중간에 여러 명의 은닉범들이 개입하다 보니 이들이 함구하면 본범 찾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2007년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문화재 도난범의 공소시효가 7년에서 10년으로 늘었지만 10년이라는 기간 역시 처벌이 이뤄지기에는 여전히 짧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 반장은 “문화재를 훔치면 징역 2년형에 처할 만큼 중범죄로 분류되지만 사실상 처벌이 어렵다 보니 재범이 일어나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늘어난 공소시효 10년도 본범들을 처벌하기에는 여전히 짧다”고 토로했다.

문화재청 단속반원들과 경주시 관계자들이 2014년 3월 경주 건첩읍 소재 송선리 고분군에서 도굴이 일어났다는 첩보를 얻고 현장을 조사하고 있다. 현재까지 도난범을 찾지 못한 채 수사는 진행 중이다./문화재청


또 통상적이라면 통화내역과 계좌 흐름 등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관련자들을 엮을 수 있지만 범행이 일어난 뒤 한참 지나야 시작될 수밖에 없는 문화재 수사의 특성상 이마저도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5년간 도난된 문화재는 모두 3,181점으로 이 가운데 회수된 문화재는 57.6%인 1,833점이다. 비교적 높은 회수율이지만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국가·시·도 지정 문화재로 한정하면 177점 중 6점만 되찾아 회수율은 3.3%로 급격히 떨어진다.

문화재 사범 단속을 강화해 회수율을 높이려면 관련 인력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별사법경찰의 지위를 가진 문화재청 단속반 인원은 현재 2명에 불과하다. 수사에 착수하면 경찰 인력이 보강되지만 일반경찰의 경우 문화재 관련 식견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전문인력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 경찰 관계자는 “문화재청의 단속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단속반원들이 수사현장에 나왔다가도 행정업무를 보기 위해 사무실로 복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며 “문화재 사범 단속과 수사의 중요성에 비해 관심과 인식이 부족한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허진기자 hj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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