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10월4일 오후6시 파리 스트라스부르역. 기관차와 객차 3량, 식당칸 1량, 짐칸 1량으로 구성된 열차가 동쪽을 향해 떠났다. 가을 거리에 어둠이 깔리고 선로도 밤에 잠겼으나 객차는 환하게 빛났다. 크리스털 샹들리에 조명 아래 외교관과 귀족·사업가 등과 취재기자 등 40명이 마호가니 나무와 스페인 가죽으로 만든 안락의자에 앉아 담소를 즐겼다. 출발 직후 호텔 출신 일류 요리사가 만든 저녁이 식탁에 올라왔다. 침대칸에는 개인 세면기까지 달렸다. 모든 것이 최고급 호화판이었던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첫 공식운행 순간이다.
오리엔트 특급열차는 뮌헨과 빈을 거쳐 베오그라드·사라예보·트리에스테를 지나 동쪽으로 내달렸다. 최종 목적지는 다뉴브강을 페리선을 타고 건넌 후 열차를 갈아타고 도착한 이스탄불. 1889년부터는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바로 갈 수 있었다. 오리엔트 특급열차는 얼마 안 지나 명망가들이 모이는 호화 열차라는 소문이 붙었다. 편도 운임이 프랑스 노동자 평균 연 수입의 4분의1 수준이었으나 유럽 대륙횡단 여행의 시간과 경비를 감당할 수 있었던 귀족과 군인과 부자들이 몰려들었다. 신분세습이 아직 남아 있던 시절 오리엔트 특급 1등실 침대차 여행은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열차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영국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도 영국 육군 대령과 미국 귀부인, 러시아 공작부인 등이 등장한다. 역설적으로 크리스티의 소설이 발표되던 1934년을 전후한 시기가 열차의 전성기였다. 두 차례 세계전쟁으로 운항이 중단됐던 열차는 갈수록 비행기에 밀렸다. 열차로 60시간이 걸리던 파리~이스탄불 노선을 비행기는 4시간 안짝에 주파했으니까. 결국 1977년 5월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이스탄불행 열차는 영원히 멈췄다.
미국 유학 시 침대차에 탔던 경험을 살려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구상하고 사업화한 벨기에 은행가의 아들 조르주 나겔마케르(당시 38세)처럼 사업을 부활하겠다는 시도가 있었지만 부분적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도 일말의 가능성은 있다. 남북한 철도가 연결되면 유라시아철도의 신기원이 열리며 새로운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탄생할지 모를 일이다. 오리엔트 특급 노선은 전쟁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영국령 인도를 견제하고 본격적인 중동 진출을 위해 바그다드까지 철로를 연장하려던 독일의 시도를 막기 위해 영국은 온갖 수단을 다 썼다. 쌓인 원한과 불만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터에서 한꺼번에 터졌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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