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4월17일 프라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알렉산드르 둡체크(사진) 제1서기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대신 소련군의 위세를 업은 구스타프 후사크가 새로운 당 제1서기로 뽑혔다. 이듬해 6월 둡체크는 당원 자격도 박탈당했다. 후사크 정권은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펼쳐 50만명에 이르는 공산당원을 내쫓았다. 당원 3분의1이 잘린 것이다. 동구권에도 민주화를 가져올 것 같았던 ‘프라하의 봄’은 이렇게 지나갔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과 자유화는 긴 동면에 들어갔다.
변화가 시작된 것은 신년 초 지도자 교체. 공산당 간부들의 불신임으로 1967년 말 물러난 독재자 안토닌 노브트니의 뒤를 47세의 둡체크가 이으며 개혁 바람이 불었다. 국민을 탄압·감시하던 비밀경찰을 해체하고 언론보도의 자유를 허용하며 다당제의 가능성까지 열었다. 소비재 생산을 늘려 국민들의 실생활 개선에 주력한다는 뜻도 밝혔다. 둡체크가 개혁에 나선 진짜 이유는 경제난. 정밀공업이 발달한 체코에 소련식 경제체제를 이식하려는 시도가 실패하며 경제상황이 극히 나빠졌다.
둡체크는 경제 재건을 위해 서방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이 필수라 여기고 국제규범에 맞는 국가 시스템을 갖추려 애썼다. 둡체크를 굳게 믿었던 소련은 마음을 돌려 짓누르기로 했다. 소련이 둡체크를 신뢰했던 것은 성분이 좋았기 때문. 둡체크의 부친은 미국에 이민했다가 자본주의에 실망, 귀국한 뒤 소련에 이주해 13년 동안 거주했던 친소주의자였다. 둡체크는 소련 편에서 독일군과 싸우다 동생을 잃은 적도 있다. 결국 소련은 프라하발 민주화의 파급을 막으려 1968년 8월 바르샤바조약군 25만명을 동원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짓이겼다. 소련군 공수부대에 잡힌 둡체크는 모스크바로 끌려갔다.
둡체크가 주창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빛났다. 소련군 탱크 포신에 꽃을 장식하려던 11세 소년이 총에 맞아 죽은 장소, 수많은 대학생이 분신자살했던 광장에서 1989년 둡체크는 마이크를 잡고 ‘자유’를 외쳤다. 공산정권은 마침내 무너졌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혁명에는 지식인들의 용기가 스며 있다. 1977년 바츨라프 하벨(훗날 체코 대통령 역임)을 비롯한 지식인 243명은 자유와 인권을 요구하는 ‘77헌장’을 발표하며 민주화의 불씨를 지켰다. 소련군 침공에 항의해 프랑스로 망명했던 작가 밀란 쿤데라는 조국의 혁명을 보며 이런 말을 남겼다. ‘망각에 대한 기억의 승리다. 정의가 이겼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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