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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1시간만에 뚝딱"...'법 같지 않은 법' 쏟아내고 규제입법은 폭주

<막내리는 20대 국회…의원입법 이대로 좋은가>

의정활동 평가 반영에 양떼기...2만2,900여건으로 역대 최다

알법·복붙법·품앗이법 등 건수 부풀리기 꼼수·편법 수두룩

의원 2배 이상 많은 英·獨, 의회발의 건수 年 100여건 불과

1건당 심사시간 달랑 2분42초...'일 제대로 하는 국회' 돼야

국회가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안건) 정국 속에서 장기 개점휴업 상태에 빠진 지난해 6월 국회 의안과 앞에 의원들에게 배포될 정부 결산보고서와 성과보고서 등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0월31일 국회 본관 7층 의안과는 여당 소속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더불어민주당이 21대 총선을 앞두고 현역의원의 공천 기준에 의정활동을 반영하는 바람에 법안발의가 한꺼번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이날은 법안발의 실적평가 마감일이었다. 이날 하루 국회에는 모두 185건(야당 발의 3건 포함)의 법안이 접수됐다. 국회사무처에 따르면 10월 마지막째 주 입법발의는 무려 483건. 9월 한 달 동안 주당 평균 100건 남짓한 의원입법이 접수된 데 비하면 4배가량 많다. 10월 마지막주 최다 입법 의원은 3선의 이춘석 의원으로 26건을 내놓았다. 여기에는 허수가 숨어 있다. 26개 법안 가운데 18개는 공공기관 임원과 특수직 공무원의 당연퇴직 규정을 ‘국가공무원법’에 일치시킨 것으로 법률 명칭만 다를 뿐 개정안 내용은 똑같다. 20대 국회 ‘입법왕’인 황주홍 민생당 의원은 정부·공공기관마다 ‘유리천장위원회’를 두자는 ‘유리천장법’을 200여건 발의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른바 복사해서 붙이는 ‘복붙법’이다.



오는 29일로 막을 내리는 20대 국회는 입법과 관련해 기록 풍년을 낳았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린 20일 현재 4년 동안 발의된 입법은 2만 4,114건. 이 중 정부 제출 법안을 제외한 의원입법은 2만 3,020건으로 전체 발의 건수 대비 95.4%를 차지한다. 발의법안 절대량과 의원입법 비중 모두 역대 최대치다.

의원입법이 늘어나는 것 자체를 무조건 탓할 수만은 없다. 대의민주주의의 발현이자 입법 수요에 대한 국회 차원의 적극적 대응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법안 부풀리기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는다. 한국입법학회장을 지낸 홍완식 건국대 로스쿨 교수는 “공천기준과 시민단체의 의정활동 평가에서 법안발의 건수 등이 주요 잣대가 되다 보니 입법 품질은 뒷전이고 절대량에 치중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며 “이제는 국회 스스로 걸러내거나 옥석 가리기가 불가능할 정도”라고 꼬집었다.

지난해 11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원회의 세법심사 광경.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은 20대 국회의원들이 단일 법률로 가장 많이 발의한 법안이다. /연합뉴스


법안 건수를 늘리기 위한 꼼수와 편법은 다양하다. 폐기된 법안을 재생하는 재탕·삼탕 법안부터 ‘각기’를 ‘각각’으로 용어만 단순하게 고친 ‘알법(알기 쉬운 법)’과 의원끼리 서로 법안발의를 밀어주는 품앗이 법안까지. 비과세·감면 규정을 담은 조세특례제한법은 유사 ·중복 법안의 온상이나 다름없다. 20대 국회에 621건이 발의돼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유는 따로 있다. 세금을 깎아주는 선심성 법안인데다 비과세·감면 조항이 300여 개로 많아 조항마다 쪼개기 입법이 용이하다. 숫자만 바꿔도 뚝딱 법안을 생산할 수 있다. 예컨대 소득·세액공제율과 한도액을 올리거나 일몰 기간을 연장하는 식이다. 재선에 성공한 수도권 의원의 한 보좌관은 “이런 법안은 작심하면 만드는 데 1시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자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은 지난해 11월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법 같지도 않은 법들이 너무 많다. 2만 몇 건이나 되는데 이게 말이 되느냐”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알법은 여야 정치권이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일괄 개정할 수 있다. 지난해 8월 문희상 국회의장은 법률에 담긴 어려운 용어를 알기 쉽게 바꾸도록 각 상임위에 요청했고 환경노동위원회는 지난 2월 위원장 제안 형태로 상임위 소관 67개 법률을 일괄 개정했다.



지난해 10월 국회 운영위의 국회사무처 국정감사에 출석한 유인태 국회 사무총장. 그는 한 달 뒤 같은 자리에서 “법 같지 않은 법들이 너무 많다”며 의원들의 양떼기 법안 발의를 비판했다. /연합뉴스


그럼 해외의 입법동향은 어떨까. 우리나라의 의원입법 건수는 주요 선진국들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 한국법제연구원이 2017년 발간한 ‘주요국 입법절차와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의회 민주주의의 본산인 영국 의회의 의원입법 발의는 연간 평균 103건(55기, 2010~2015년 기준)으로 우리 국회의 5% 수준에도 이르지 못한다. 독일은 영국과 엇비슷하다. 양국 의원 수가 우리보다 2배 이상 많은데도 이 정도다. 미국 의회의 한 회기(2년)당 발의 건수는 1만건 안팎으로 우리 국회와 비슷하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의원 1인 발의가 가능하고 우리와 비교하면 상하 양원 의원 수가 1.7배, 인구 수로는 6배나 많은 점을 고려해야 한다. 홍성민 한국법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입법 인플레이션과 품질저하의 악순환을 막으려면 의정활동의 정량평가부터 줄이거나 제외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쏟아지는 법안에 비해 실제 법률로 성사되는 가결률이 떨어진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15대 국회에서 40%를 기록한 의원입법 가결률은 20대 국회에서 12.7%로 추락했다. 역대 최저치다. 물론 법률 안정성·연속성 차원에서 잦은 개정이나 새 법률 제정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입법만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미 의회의 법안 가결률은 채 10%가 안 된다. 특히 미 의회가 상임위 차원에서 법안 80%를 자체적으로 걸러내 폐기한 뒤 나머지 20% 정도만 집중 심사하는 것은 ‘무더기 법안 계류→무더기 임기만료 자동폐기’가 되풀이되는 우리 국회와 사뭇 다른 양상이다.

지난 2018년 2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가 국회 파행으로 멈춘 가운데 법안심사 자료가 테이블 위에 쌓여 있다. 행안위는 20대 국회에서 가장 많은 계류 법안(2,283건)을 남긴 상임위다. /연합뉴스


법안 홍수보다 더 큰 문제는 법안 심사의 부실·졸속이다. 법률소비자연맹이 공개한 20대 국회상임위 운영실태 조사 현황에 따르면 24개 법안심사소위가 4년(2016.5~2019.12) 동안 총 634번 열렸고 회의시간은 총 1,758시간13분으로 파악됐다. 이를 4년 누적 안건 수 4만3,453건(이월포함)으로 나누면 법안 한 건당 심사시간은 2분42초에 불과하다. 이렇다면 품질 낮은 규제입법이 양산되는 부작용을 피할 길이 없다.

의원입법은 관계부처 협의와 규제개혁위원회 심사, 국무의회 의결 등 촘촘한 사전심의와 광범위한 의견수렴을 거치는 정부입법과 달리 10명 이상의 의원 서명으로 발의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가 충분한 검토와 논의 없이 입법을 추진하면 정치적 잣대로 법안을 졸속 통과시킬 우려가 크다. 부실 과잉입법의 부작용이 오롯이 국민과 기업의 부담으로 전가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면세점 특허기간을 10년에서 5년으로 줄여 과잉투자와 고용불안을 야기한 관세법 (면세점법)을 비롯해 소비자 편익을 제한한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법 (단통법) 등이 대표적이다. 올해 초 국회를 통과한 ‘타다 금지법’은 지금도 논란이 있고 종합부동산세 강화 법안은 여권 내부에서도 수정론이 제기된다. 심지어 정부가 사전 규제 심사와 다른 부처의 반대를 회피하기 위해 법안을 만들어 의원에게 발의를 요청하는 청부입법마저 횡행하고 있다. 국회의 입법만능주의와 부처의 행정편의주의가 결합한 정부·의원 짬짜미 편법이 얼마나 이뤄지는지 확인 불가능한 점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체감규제포럼·코리아스타트업포럼·벤처기업협회 등 4개 단체가 지난 5월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20대 국회의 인터넷 규제 입법 졸속처리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서울경제DB


전문가들은 입법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입법실적주의를 지양하고 입법 품질을 담보할 제도적 뒷받침 마련이 요구된다고 지적한다. 한국규제학회장을 지낸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우리나라가 후진국도 아닌데 새 규범과 제도를 법률로 남발해야 하는지 의문”이라며 “그 방향이 국민에게 새로운 부담을 안기거나 벌칙을 강화하고 경쟁을 제한한다면 대단히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의원입법에 대해 “정부입법처럼 사전 규제 심사를 받도록 하는 것이 입법권 침해로 어렵다면 규제비용보고서 첨부 같은 최소한의 견제장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법안 가결률이 높다고 해서 ‘일하는 국회’로 보기는 어렵다. 졸속·부실 처리로도 정량지표를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하는 국회가 요구되지만 ‘제대로 일 잘하는 국회’가 더 중요하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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