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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의 뒤안길]금석문의 가치

문헌사료 부족한 고대사 연구에 '단비'

국보 제264호 포항 냉수리 신라비. /사진제공=문화재청




금석문은 쇠로 만든 종이나 돌로 만든 비석 등에 새겨진 글자와 그림을 일컫는 용어지만 넓은 의미로는 목간과 죽간, 국왕이 사용하는 인장인 ‘새인’, 문서를 끈으로 묶고 봉할 때 쓰던 진흙 인장인 ‘봉니’, 거북 등딱지나 짐승 뼈에 새긴 ‘갑골문’의 문자까지도 포괄한다.

이 가운데 수량이 가장 많은 것은 비석에 새겨진 금석문이다. 비석의 재료인 돌은 쉽게 구할 수 있고 내구성도 강하기에 기록을 남겨 대대손손 전하기에 최적의 소재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전후로 금석문의 탁본들이 유입되면서 석문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고 비석 건립이 시작됐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 백제 부여사택지적비(보물 제1845호),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국보 제3호)는 모두 선돌 모양의 비석으로 사료적 가치가 크다. 통일신라시대의 무열왕릉 이수와 귀부·사산비명·화엄석경 등은 글과 글씨를 보든 새겨진 조각을 봐서든 예술적 가치 면에서 전부 최고였다. 고려는 국왕에서 신하들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신앙했던 만큼 탑비가 많았던 반면 조선은 유학을 숭상했기에 선조와 부모에 대한 효성의 하나로 분묘를 화려하게 축조하고 석물을 갖추고 신분에 맞게 비석을 세우는 일이 성행했다. 고려 때는 없던 국왕의 신도비가 처음으로 태조의 건원릉에 세워졌는가 하면, 관료의 묘에도 비석들이 세워지게 된다.



고대 금석문은 문헌사료가 부족한 시대, 특히 고대사를 연구할 때 ‘오랜 가뭄에 단비’와 같은 유용한 역사자료다. 반면 조선시대 금석문은 전적과 고문서에 밀려 학술적·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소외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선시대 금석문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조사와 가치 연구도 충분히 해볼 만한 분야다.
/이종숙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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