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오색인문학] 그래비티, 제도권 미술을 조롱하다

■예술가, 그 빛과 그림자... 익명의 명성

이연식 미술사가

스프레이로 도시곳곳 도배한 벽화

1960년대 美서 본격적으로 시작

자본주의 모순·공권력 전횡 고발한

뱅크시 블랙유머 작품 매력 커지자

그라피티, 점차 매매대상으로 변해

불온한 성격 약해지고 합법적 작업

익명성 함정에 체제의 포로로 변질

뱅크시, ‘그라피티는 범죄입니다.’ 뉴욕, 2013년




예술이 세상에 대한 반항이라면 오늘날 반항으로서의 예술을 알기 쉬운 형식으로 보여주는 예술가는 그라피티 아티스트일 것이다. 그라피티는 엄연히 불법이다. 한국에서 그라피티를 함부로 했다가는 재물손괴죄로 잡혀 들어간다.

그라피티는 회화의 원초적 형식에서 유래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회화는 선사시대 동굴벽화다.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내부 벽화, 비잔틴의 모자이크, 이탈리아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 프랑스 고딕성당의 눈부신 스테인드글라스 등 회화는 건축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중세 말부터 부르주아가 개인적으로 회화 작품을 구입하면서 미술의 무게중심은 액자에 담긴 개별 작품으로 이동했다. 그런 흐름 속에도 멕시코의 벽화운동이나 미국 대공황 시기의 벽화처럼 정부의 지원으로 진행된 대규모 프로젝트도 있다.

물론 그라피티와 벽화에는 차이가 있다. 과거의 벽화는 주문한 사람의 의도와 취향을 만족시켰지만 오늘날의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도시 곳곳에 자기가 보기에만 좋은 그림을 그린다. 그라피티는 대도시의 골칫덩어리이고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은 경찰과 숨바꼭질하듯 작업을 한다. 재빨리 그리고 도망치기 위해 그들은 스프레이를 애용한다.

블레크 르 라의 그라피티, 런던, 2008년


그라피티는 1960년대 미국에서 몇몇 청년들이 자신들의 이름과 메시지를 거리의 담벼락과 건물에 남기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970년대에는 뉴욕 지하철이 그라피티로 뒤덮이면서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유럽에서는 블레크 르 라(1952~)가 1981년부터 파리 곳곳에 쥐를 그렸다. ‘쥐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동물’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런 배경에서 뱅크시(1974~)가 등장했다. 그는 런던의 브리스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그라피티 아티스트들과 달리 뱅크시는 사회와 환경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자본주의의 모순과 공권력의 전횡을 고발한다. 시위대가 화염병이나 돌 대신 꽃다발을 던지고, 모나리자는 로켓포를 어깨에 메고, 어린 소녀가 병사를 무장해제시킨다. 르 라의 영향을 받아 무법자인 쥐들을 캐릭터처럼 활용하고 인간 대신 원숭이를 그려 넣어 무지와 아둔함을 풍자한다.

뱅크시, 런던 메이페어, 2011년




뱅크시가 매력적인 것은 그의 주제의식보다 블랙유머와 경쾌한 발상 때문이다. 그는 예술이 거래되고 감상되는 과정 전체를 놓고 게임을 즐긴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과 브루클린미술관에 들어가 자신의 그림을 미술관 벽에 걸어둔다. 이 작품들은 조금씩 이상하다. 18세기 영국 군인이 그라피티 아티스트처럼 스프레이를 들고 있거나 선사시대의 인물이 대형마트에서 쓰는 카트를 밀며 걷는 것이다. 대부분 뱅크시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공개하기 전까지는 미술관에 그대로 전시된다. 미술관 직원은 구태에 사로잡혀, 관객은 미술관의 권위에 짓눌려 작품의 허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뱅크시가 유명해지자 그의 그라피티는 매매 대상이 됐다. 보통 그라피티는 지워지지만 뱅크시의 그라피티는 지방의회의 결정에 따라 보존되거나 건물 소유주가 그림 위에 투명한 벽을 설치하기도 한다. 그의 그라피티를 둘러보는 관광코스도 있다. 미술 시장을 조롱하고 비판하던 뱅크시는 경매장에 나온 자신의 작품에 장난을 치기도 했다. ‘러브 인 더 빈(Love in the Bin)’은 2018년 10월 소더비 경매에서 104만파운드(약 15억4,000만 원)에 낙찰됐다. 낙찰이 선언되는 순간 액자 속에 숨겨졌던 파쇄기가 작동했다. 파쇄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작품은 절반만 파쇄됐다. 그러나 낙찰자는 구입을 철회하지 않았다.

낭만주의 이래 예술은 사회 주류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당혹스럽게 만들어왔지만 정작 오늘날의 미술은 미술계 내부의 언어와 관례에 사로잡혀 난해하기만 할 뿐 세상을 흔들어놓지도 않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지도 못한다. 뱅크시를 비롯한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은 그라피티가 소위 제도권 미술보다 더 뚜렷한 미학적인 의의를 갖고 비판적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그라피티가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그것이 지녔던 불온한 성격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한때 처벌을 무릅쓰고 활동했던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은 이제는 합법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도시를 꾸미는 데 일조하고 있다. 뱅크시만은 아직 체제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여전히 익명이다. 그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다채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충실한 조력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뱅크시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 뱅크시라는 상품성 높은 예술가의 아우라를 없앨 필요는 없다. 뱅크시는 익명으로 자본주의를 공격해왔지만 이제 익명성의 함정에 빠져 체제의 포로가 됐다. 그라피티를 처음 시작했던 10대 후반의 소년 뱅크시는 이렇게 되리라고 상상도 할 수 없었으리라.

이연식 미술사가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