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는 해운 역사상 가장 극적인 한 해였다. 1·4분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본격 확산하면서 전 세계 물동량은 전년 동기 대비 5.1% 감소했다. 지난 2008년 금융 위기부터 10년 넘게 불황을 겪고 있는 글로벌 선사들은 줄어든 물동량에 화들짝 놀라 선제적으로 선복(적재 용량)을 줄였다. 그런데 2·4분기가 다 지나가도록 물동량은 줄지 않았고 운임도 떨어지지 않았다. 선사들은 뒤늦게 배를 구하러 나섰지만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배들은 국제해사기구(IMO) 환경 규제로 탈황 장치를 설치하거나 정기점검을 받으러 도크에 들어간 상태였다.
반전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6월 무렵 중국에서 미국으로 물건을 보낼 때 배를 구하기 쉽지 않아졌다는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하더니 미주 서안 노선 운임이 치솟기 시작했다. 공급 부족이 운임 상승으로 이어진 것이다. 2017년 2월 한진해운 파산 이후 국내 최대 원양선사가 됐지만 힘든 싸움을 벌이던 HMM(옛 현대상선)은 운임 상승에 모처럼 날개를 달았다. 다른 선사들이 배를 구하러 다니는 동안 HMM은 세계 최대 규모인 2만4,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선박 12척이 차례대로 투입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해운동맹 활동도 개시됐다. 이를 바탕으로 HMM은 지난해 2·4분기 무려 21분기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했고 3·4분기에도 영업이익을 냈다. 이러한 HMM의 환골탈태 배경에는 한국해양진흥공사의 지원이 있었다. /대담=김현수 경제부 부장 hskim@sedaily.com
황호선 해양진흥공사 사장은 6일 부산 해운대구 본사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코로나19가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HMM은 물론이고 해양진흥공사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며 해운 업황 개선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황 사장은 해양진흥공사 초대 사장으로 부임해 올해로 3년째 임기를 보내고 있다.
해양진흥공사는 한진해운 파산으로 경쟁력이 훼손된 국내 해운업을 되살리기 위해 2018년 7월 해양수산부 산하 기관으로 설립됐다. 정부가 내놓은 해운 재건 5개년 계획을 실질적으로 수행하는 기관으로서 출범 이후 줄곧 HMM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집중해왔다.
해양진흥공사는 선박금융을 통해 HMM이 초대형 컨테이너 선박을 발주할 수 있도록 자금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반쪽짜리였던 해운 동맹(얼라이언스)에 정식 가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지난해 말까지 HMM에 투입한 금액만 3조 4,856억 원이다. 해양진흥공사의 적극적인 지원 가운데 시황 회복이 이뤄지면서 HMM은 지긋지긋한 적자 고리를 끊어낼 수 있었다. 지난해 3월 1주당 2,120원까지 떨어졌던 HMM 주가가 최근 1만 6,000원까지 오른 것은 국내 해운업의 극적인 회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취임하자마자 HMM 적자 규모를 듣고 눈앞이 캄캄했던 황 사장도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해양진흥공사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친환경 규제에 대응하고 선복도 늘려야 했기 때문에 초대형 컨테이너 선박을 발주했는데 시장의 공급 부족 시기와 맞아떨어졌다”며 “하지만 선제적으로 초대형 컨테이너 선박을 확보하지 않고 글로벌 해운동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면 HMM은 전 세계적인 운임 상승의 효과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HMM의 진짜 싸움은 올해 하반기부터라고 봤다. 코로나19 상황에서 글로벌 선사들이 자발적으로 선복을 줄이면서 공급 부족이 나타난 만큼 다시 선복이 늘어나고 물동량이 감소하면 운임은 언제든지 낮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황 사장은 “올해 하반기 글로벌 경기가 회복 국면에 진입하면 재화 대신 서비스에 소비가 집중되면서 물동량 조정이 불가피할 것”이라며 “빈 컨테이너 수급 불균형도 점차 해소되고 있어 운임이 하향 안정화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부터가 HMM의 진짜 싸움”이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흑자 전환에도 구조 조정의 고삐를 늦추지 않을 계획이다. 산업은행과 해양진흥공사는 지난해 12월 31일로 종료 예정이었던 ‘HMM의 경쟁력 제고 방안 이행 약정’ 기간을 올해 말까지 1년 더 연장했다. 당초 산은은 지난해를 끝으로 HMM 경영관리에서 손을 떼고 해양진흥공사의 단독 관리 체제로 전환할 예정이었지만 공동관리 기간을 1년 늘리기로 한 것이다. HMM이 흑자로 전환했지만 아직 완전한 경영 정상화가 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진단 때문이다. 황 사장은 “HMM이 지난해 3·4분기 영업이익을 4,000억 원 가까이 냈어도 고비용 구조 때문에 당기순이익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며 “여전히 코로나19 등 대내외 환경이 불안정한 상태이고 그동안 적자로 인한 누적 결손금이 4조 5,000억 원에 달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재무구조 개선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HMM의 근본적인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고비용 용선 구조를 지속적으로 뜯어고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최근 해양수산부와 해양진흥공사는 오는 2025년까지 25만 TEU 규모의 선박 33척을 추가로 확보한다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신규 선박 투자에는 5조 원이 더 필요하다. 컨테이너 박스 등 필수 영업 자산과 국내외 터미널 추가 확보에도 박차를 가한다. 황 사장은 “올해 1만 6,000TEU급 8척이 인도되면 HMM 선복량은 84만 TEU로 늘어나는데 해운동맹 내 지위를 높이고 독자적인 운항 역량을 갖추려면 최소 100만 TEU 이상 선대가 필요하다”며 “신규 투자금은 HMM이 자체 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추진하되 신용도 문제 등으로 경쟁력 있는 자금 조달이 어려우면 그때 가서 보증 프로그램을 통해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해양진흥공사는 HMM의 규모가 커지는 만큼 화물 확보를 위해 국적 화물 적취율을 개선하는 동시에 선원을 확충하고 신규 시장 진출을 위한 해외 영업 조직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100만 TEU급 글로벌 선사가 되면 활동 반경이 넓어지기 때문에 선사도 덩치를 키워야 한다. 다만 HMM은 해운 불황 시기에 6~8년 동안 연봉이 동결되면서 직원 사기가 저하됐을 뿐 아니라 동종 업계 대비 낮은 처우로 우수 인력들이 이탈한 상황이다. 이로 인해 HMM 해상직 노조는 지난해 임금 협상 과정에서 창립 이후 첫 파업을 언급하며 임금 인상률 8%를 요구하기도 했다. 노사가 지난해 말 임금 인상률 2.8%로 극적 합의했지만 같은 상황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이에 대해 황 사장은 “코로나19 상황에서 영업이익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한 직원들에게 보상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지만 대규모 공적 자금 투입으로 영업 실적이 개선된 점이나 열악한 재무구조를 지속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면서도 “앞으로 HMM 임직원들이 더 열심히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 경영 정상화 진행과 연계해 인력 확충이나 처우 개선 등에 대한 단계적인 개선 방안도 HMM·산은 등과 지속적으로 협의해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HMM은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지만 중소 선사는 여전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국내 중소 선사들이 주로 활동하는 동남아 등 아시아 역내 시장에서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양진흥공사도 설립 이후 HMM에 3조 4,856억 원을 투입하는 동안 나머지 중소 선사 80곳에 2조 2,746억 원을 지원하면서 형평성 지적을 꾸준히 받아왔다. 중소 선사 1곳당 지원 규모가 284억 원에 그치기 때문이다. 황 사장은 중소 선사에 대한 지원이 다소 미진했던 부분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올해부터 적극적으로 지원 방안을 늘려갈 계획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특히 중소 벌크 선사에 대한 지원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황 사장은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마련한 1조 1,700억 원 가운데 80%에 달하는 9,388억 원을 중견·중소 선사에 배정해 지원하고 있다”며 “올해부터 성장 잠재력이 있는 중소 선사를 선정해 금융뿐 아니라 비금융 부문에서도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해 중견 선사로 육성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적 선사에 합리적 가격으로 배를 빌려주는 국적 선주사 육성 방안에 대해서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 현재 해양진흥공사는 금융리스(BBC-HP) 형태로 리스 기간이 끝나면 선사에 선박 매입 의무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선박을 공급하고 있다. 정부는 여기에 리스 기간이 끝나도 선박 매입 의무가 없는 운용리스(BBC) 방식을 추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운용 리스는 선사가 선박 소유에 따른 금융 부담과 부채비율 상승 문제를 줄일 수 있다.
황 사장은 “공사 입장에서 캐나다 시스팬과 같은 글로벌 선주사처럼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배를 시황에 따라 사고파는 방식으로 자산을 운용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며 “또 돈을 벌려면 외국적 선사에도 배를 빌려줘야 하는데 국민 세금으로 하는 사업이 맞는지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오랜 경험을 쌓은 글로벌 선주들도 시황 예측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분석 능력부터 길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며 “결국 선사가 금융리스나 운용리스 중에 선택할 문제지만 일단 내부적으로 여러 방안을 검토하는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정리=조지원기자 jw@sedaily.com 사진제공=한국해양진흥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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