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16일 국무회의에서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우리 정부는 부정부패와 불공정을 혁파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고 밝혔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땅 투기 사태가 터진 지 2주 만에 뒤늦은 사과와 함께 뜬금없이 ‘촛불 정부’를 내세운 것이다. 문 대통령은 15일에도 “부동산 적폐 청산은 우리 정부를 탄생시킨 촛불 정신을 구현하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공교롭게도 대통령이 촛불 혁명을 꺼내든 날 서울 강남 LH 앞에서는 촛불 집회가 열렸다. 진보 성향의 청년 단체는 ‘청년들은 월세 전전, LH는 투기 전전’ ‘공정 희망 고문의 끝은 벼락 거지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30 세대가 누구인가. 문재인 정부를 출범시킨 일등공신이자 핵심 지지층이다. 하지만 지금 청년들은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며 절규하고 있다.
문 대통령이 새삼 촛불 정부를 자처하는 현실은 역으로 정권의 위기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임기 말까지 ‘촛불’과 ‘적폐’라는 이분법을 동원해 지지층을 결집하고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전략이다. 집권 내내 그랬듯이 적폐 청산을 명분으로 삼아 국민을 둘로 가르는 분열 정치를 정권 유지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촛불 정신은 한낱 정권 유지의 수단이 아니다. 그해 겨울 비바람을 무릅쓰고 집회에 참석했던 국민들은 “이게 나라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부르짖었다. 내 편만 챙기는 ‘선택적 공정’에 분노하면서 모두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공동체 사회를 간절히 원했다. 이제 국민들은 과연 현 정부가 촛불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이행했는지 묻고 있다.
LH 사태만 해도 그렇다. 문 대통령이 뒤늦게 사과를 했지만 국민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에는 역부족이다. 엉터리 정책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커녕 시장 안정에 주력하느라 부패에 신경쓰지 못했다는 주장에는 말문이 막힌다. 매번 투기 수요를 막겠다고 떠들어놓고 뒤로는 공직자 투기판을 조장했으니 누군들 납득하겠나. 추락하는 지지율을 보면서 사태가 이 정도로 번질지 몰랐다고 털어놓는 여권 인사들도 많다. 자신들이 적폐라고 몰아붙이는 과거 정부와 너무나 흡사한 모습이다. 촛불로 탄생한 정부가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신(新)기득권 세력으로 변질됐다는 방증이다.
국민은 촛불을 들면서 편안하고 살기 좋은 나라를 원했다. 그런 촛불 정신은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을 통해 구현된다. 그러자면 경쟁 원리에 따라 시장의 흐름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맡겨야 한다. 하지만 정부는 시장을 무시하고 짓밟는 정책을 펼쳤다. 공공이 주도하면 선(善)이고 민간이 나서면 악(惡)이라는 공공 만능주의를 밀어붙였다. 강남 집값을 잡겠다며 풍선 효과를 일으켜 전국을 들쑤셔 놓았다. 그래놓고 전체의 92.1%인 공시가격 6억 원 이하 주택 보유자는 재산세를 감면해준다며 갈라치기하고 있다. 이 정부 들어 전세 대란, 고용 대란으로 직격탄을 맞은 서민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분위기다. 지금 대한민국은 시장의 정의야말로 민생과 직결되는 가장 중요한 촛불 정신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촛불로 탄생한 문 정부는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조국·윤미향 사태를 거치면서 이 정부의 공정과 정의는 자기변명용 구호가 되고 말았다. 사람이 아니라 제도를 지켜달라는 촛불 정신은 사라져버렸다. 촛불 정신을 내세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법치주의라는 소중한 헌법 정신마저 훼손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내년 대선에서 ‘공정과 정의’라는 시대정신이 승패를 가를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문 대통령이 취임 초 내걸었던 대국민 약속이 임기 말을 맞아 재소환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광화문 광장에 모였던 국민들은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더 이상 ‘촛불’을 외치며 촛불 정신을 왜곡하지 말라. /정상범 논설위원 ssa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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