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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택배기사의 목마른 가을





택배기사의 가을은 감상에 젖어들 시간조차 없다. 이른바 쩔배(절인 배추)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 그 쩔배의 계절 중 어느 날, C빌라 5층에 쩔배 8박스가 왔다. 댁에 계신지 확인차 전화를 하였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청했다. 누구라도 도와준다면. 아니 그저 불안하게 주정차된 차라도 내려와서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C빌라 5층 아주머니는 택배기사가 집까지 가져다주어야지 왜 도와주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셨다. 2박스씩 4번을 오르고 내려 배송을 끝냈다. 현관문과 정면으로 있었던 작은 방에는 아들로 보이는 건장한 청년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뭘 꼭 기대한 것은 아니었잖아’라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넸지만 기대하지 않았다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 않은 말이 있기는 했다. 목이 너무 마르니 물 한잔만 달라는 말이었다. (기사님,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 2020년 독립출판물)

택배상자 같은 흙색 표지로 감싸인 독립출판물을 보면서 울고 웃었다. 작가명 ‘기사님’. 22년 차 택배기사의 이야기이다. 모두가 ‘기사님’을 기다린다. 아니, 실은 구매한 물건을 기다린다. 그러다보니 그 물건을 나르는 것은 ‘사람’임을 잊는다. 내일 급히 출국하니 공항으로 택배를 가져오라는 사람, 낮술을 마시다 해코지와 욕설을 하는 사람, ‘우리 개는 안 물어요’라며 이빨을 드러낸 개 옆에서 환하게 웃는 사람―천태만상의 인간들을 보면 한숨이 나오다가도, 크리스마스에 산타 대신 왔다고 말해달란 요청사항을 기꺼이 들어주는 기사님의 모습엔 마음이 포근해진다.



택배기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트럭 안의 물건은 당일에 배송을 끝내야 한다. 이렇게 소금물 먹은 ‘쩔배’들이 몰아치는 가을에도, 심지어 동생이 사망한 날에도. 오늘도 상처받고 목말라하는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 택배를 나르고 있다. 이 책은 기사님의 딸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세상에 남기기 위해 제작했다. /이연실 문학동네 편집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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