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서 모 과장은 최근 자신의 퇴직연금 수익률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5년 전 A 은행에서 가입한 퇴직연금 확정기여형(DC) 상품의 연 환산 수익률이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랑 1.7%. 수익률이 저조한 이유를 알고는 또 한번 가슴을 쳤다. 적립한 퇴직연금의 90% 이상이 연이율 1.5%도 안 되는 정기예금 상품에 투자되고 있었다. 서 과장은 “최근 고령화가 빨라지고 있다는 뉴스에 내 노후도 걱정이 돼서 퇴직연금을 살펴봤는데 1%대 수익률인 것을 알고는 분통이 터졌다”고 말했다.
봉급생활자의 노후를 책임질 최후의 안전판인 퇴직연금 체질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9일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6~2020년) 퇴직연금의 연 환산 수익률은 1.65%에 그쳤다. 수수료 0.42%를 빼고 물가 상승률을 고려하면 사실상 마이너스 성적표다. 이런 사이 퇴직연금 규모는 지난해 255조 원에서 올해 290조 원으로 커지고 있어, 운용 규모가 늘어나는 만큼 금융권 수수료 수입도 덩달아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박종원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퇴직연금 사업자의 과도한 이익 실현을 제한하고 가입자 수익률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퇴직연금제도를 손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1%대 수익률 정체…‘노후 소득원’ 기능 상실=국내 주요 연기금의 최근 5년간 수익률을 보면 국민연금이 5.39%로 가장 높다. 사학연금과 공무원연금도이 각각 5.08%, 5.43%에 달한다. 연평균 6~8% 수준인 미국과 호주·영국 등의 퇴직연금 수익률과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
반면 우리나라 퇴직연금은 오랜 기간 수익률 1%대에 정착해 있다. 실질 노후 소득 대체율도 15% 수준에 머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노후 소득 대체율인 55.2%와 비교하면 5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어서 수익률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해 코스피가 30% 넘게 오른 덕분에 국민연금이 국내외 주식 투자에서 9.7%의 수익률을 기록한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낮은 수익률로 연금 수령을 위한 의미 있는 금액 축적이 되지 않아 퇴직과 함께 바로 일시금을 수령하는 가입자가 90%를 넘는다”면서 “해외의 퇴직연금 선진국이 높은 수익률 실현을 위해 도입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으로 개편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낮은 수익률 원인은 원리금 보장형에 90% 운용 탓=우리나라 퇴직연금의 수익률이 해외에 비해 크게 낮은 가장 큰 이유는 원리금 보장형 상품 중심의 운용 방식이다. 현재 퇴직연금 적립금의 90%(230조 원)가 예적금이나 보험 상품과 같은 원리금 보장형 상품에 투자되고 있다. 퇴직연금이 도입된 직후인 지난 2006년의 은행 예적금 금리는 5% 수준이었다. 원리금 보장 상품 투자로 나쁜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초저금리 시대에 접어들어 최근 5년간 연평균 1% 후반에 그치고 있다. 기간을 10년으로 늘려도 2% 중반에 불과하다. 반면에 펀드나 주식 투자로 돈을 굴리는 실적 배당형은 10%가량의 수익률을 거뒀다. 원리금 보장형 상품과 비교해 원금을 10배가량 늘린 셈이다. 이런 탓에 발 빠른 투자자들은 지난해부터 실적 배당형 상품에 투자하기 위해 연금 계좌를 증권사로 옮기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만 은행과 보험권의 연금 계좌 가운데 1조 1,300억 원의 퇴직연금이 증권사로 넘어왔다. 전년 대비 152% 폭증한 수치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현재는 금융사들이 소극적으로 운용하면서 수수료만 받아가는 구조”라며 “다양한 자산군에 투자해 수익률을 올릴 수 있게 체질을 개선함으로써 퇴직연금이 실질적인 연금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위험 수준 조절 ‘디폴트옵션’으로 수익률 높여야=은행·보험권은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노후 자산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원금 손실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다. 당장 2016년(-0.13%)과 2018년(-3.82%) 실적 배당형 상품의 수익률이 마이너스였을 때 원금 보장형 상품은 1% 후반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주식시장 침체가 원인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간담회에서 김평섭 은행연합회 상무는 “국회가 추진하는 디폴트옵션에 원리금 보장 상품이 없어 고객이 선택을 못 할 경우가 있는데 펀드로 운영해 손실이 발생한다면 누가 책임져야 하느냐”며 퇴직연금 개편 신중론을 지지했다. 그러나 금융투자 업계는 우려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가입자의 예상 은퇴 시기에 맞춰 운용사가 주식과 채권·원자재 등 자산 비중을 조절해 운용하는 상품인 타깃데이트펀드(TDF)를 그 사례로 들고 있다. 실제 미국의 DC형 퇴직연금 가운데 TDF 상품에 투자하는 비중은 지난해 말 30%를 넘었고 매년 증가 추세다. 윤석명 한국연금학회장은 “투자 위험이 낮은 자산의 비중을 늘리거나 위험 수준을 조절할 수 있는 디폴트옵션 제도를 도입하고 노동부와 금융위원회가 가입자 이익을 우선하는 상품을 인가하면 안정성 보장은 물론 책임 논란도 없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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