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천연가스를 무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에너지 안보 보좌관인 아모스 호흐슈테인은 지난 25일(현지 시간) 온라인 기자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하며 러시아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세계 최대 풍력발전단지였던 북해의 바람이 잦아들자 러시아는 곧바로 속내를 드러냈다. 유럽 액화천연가스(LNG) 수요의 40%를 공급하는 러시아는 유럽의 에너지 위기에도 공급을 늘리지 않는다. 독일과 러시아를 잇는 천연가스 송유관 ‘노드스트림2’의 건설 승인과 크림반도 강제 합병으로 촉발된 유럽연합(EU)의 제재를 푸는 데 가스 공급을 지렛대로 이용하려 한다.
러시아와 같은 주변국이 자국의 ‘에너지 안보’를 좌우하는 상황에 한국은 자유로울까. 아이러니하게도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을 기반으로 한 탄소 중립에 가속을 붙이며 스스로 주변국에 에너지를 의존하려 한다. 탄소 배출 감축에 가장 적극적이던 유럽 등도 에너지 대란으로 탈탄소 속도 조절론이 대두하고 있는데도 우리 정부는 동북아시아 그리드 도입 등을 통해 에너지 안보 리스크까지 높이며 탄소 중립에 나서는 모습이다. 아예 세계 1·3위 탄소 배출국인 중국과 인도는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제출 요구를 거부했다. 31일 개막하는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의 성과 도출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탄소중립위원회의 오는 2050년 탄소 중립 ‘시나리오 B’ 안에는 2050년 전체 전력 소비량의 2.7%가량인 33.1TWh를 동북아 그리드로부터 공급받는다는 계획이 포함돼 있다. 지난해 국내 신재생 발전량(22.3TWh)의 1.5배가량이다. 탈원전 정책에 따른 기저 전력원 감소와 발전 간헐성 등이 나타나는 신재생 발전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동북아 그리드와 같은 방안도 장기적으로 고려 대상으로 설정했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동북아 그리드에 대해 외교·안보는 물론 경제성 측면 등 모든 점에서 위험천만한 방안이라고 지적한다. 우선 동북아 그리드를 통해 전력망 연결 대상인 중국·일본·러시아는 언제든 에너지망을 볼모로 삼을 수 있는 국가들이다. 중국은 2016년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와 관련해 무역 보복에 나선 후 아직 이 같은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역사 문제가 두고두고 발목을 잡는 데다 2년 전 단행한 무역 보복 등 경제적 앙금이 상당하다. 일본은 우리 정부의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에도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어 한일 관계 개선은 향후에도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탄소 중립 등 미국과 주요 이슈마다 대립하고 있는 러시아는 ‘한·러’ 관계보다 ‘미·러’ 관계에 따라 전력 공급에 변수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러시아와 전력 계통망을 연결할 경우 관련 망이 북한 지역을 지날 수밖에 없어 자칫 남북 관계에 따라 국내 에너지 안보까지 휘청일 수 있다.
동북아 그리드는 엄청난 경제적 비용도 치러야 한다. 중국·러시아·일본 등과 송전망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최소 수조 원의 비용이 소요될 수 있다. 여기다 적정 요금 산출도 어렵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1㎾h당 가정용 기준 전력 가격은 러시아(3.9달러), 한국(10.2달러), 일본(23.0달러), 중국(8.5달러)이 상당한 격차를 보인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유럽의 경우 EU로 묶여 있는 데다 이전부터 협력을 많이 한 만큼 서로 간 전력 계통망이 연결돼 있다 하더라도 에너지 안보 이슈가 제기되지 않는다”며 “동북아 에너지 그리드는 에너지 수급 차원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 차원에서 다뤄야 할 정도의 이슈라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