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석유공사는 지난해 창사 이래 처음으로 완전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석유공사가 최악의 재무 상황으로 내몰릴 것은 예상된 수순이었다. 4,000억~5,000억 원의 연간 영업이익을 내지만 4,000억 원에 달하는 이자 비용을 포함한 영업외비용에 부채가 늘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에서 자구책인 재무구조 개선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난 4월 ‘해외 자원 개발 혁신 태스크포스(TF)’가 공사에 대한 지원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문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정부가 석유공사에 책임을 떠밀어두고 방관한다면 빚이 빚을 낳는 악순환을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자원 개발 적폐인 석유공사에 대한 추가 지원에 다시 한 번 선을 그었다. 석유공사의 재무구조 개선 문제는 다음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게 됐다. 자원 개발 TF에 관여한 한 인사는 “공기업 자체 역량으로 재무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라며 “‘구조 조정부터 하라’며 원칙론을 고수하는 것은 다음 정권에 부실 폭탄을 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석유공사가 이자 비용에 허덕이는 것은 과거 무리하게 추진한 해외 자원 개발 때문이다. 실적을 채우기 위해 외부 자금을 끌어 자원 개발에 나섰다가 주요 사업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캐나다 하베스트 유전 인수(4조 8,000억 원 규모)와 이라크 쿠르드 유전·사회간접자본(SOC) 연계 사업(1조 원 규모)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해외사업 추진 과정에서 과도하게 차입을 늘린 탓에 매년 수천억원대의 이자비용이 발생하고 있다.
정부는 공사가 부실 자산을 정리하면 재무구조가 개선 될 것으로 봤지만 실상은 달랐다. 매각 가격이 매입가에 미치지 못 하는 탓이 크다. 일례로 올 초 석유공사가 2009년 8,000억원에 매입한 페루 석유회사 사비아페루를 28억원에 매각했다. 광구의 자산 가치가 갈수록 떨어지기 때문에 팔지 않을수록 손해를 보는 것은 분명하지만 팔아도 환경 복구 비용 등을 감당해야 해 수익을 남기기 어려운 사업도 적잖다. 석유공사의 한 관계자는 “캐나다에 보유한 하베스트의 경우 매각해도 공사 수익 개선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비우량 자산을 매입하겠다는 인수자가 알짜 자산의 지분을 함께 요구하는 일도 잦아 매각 작업이 지연되는 일도 잦다.
재무구조 개선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자산을 팔아치우며 국내 유일의 석유 개발 공기업인 석유공사의 자원 개발 역량마저 크게 위축되고 있다는 점이다. 석유공사의 ‘2022∼2026년 중장기 경영 목표’에 따르면 공사의 연간 원유 생산량은 2020년 6,040만 배럴에서 2026년 4,360만 배럴까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에너지 안보를 위해 연간 5,000만 배럴 수준은 유지해야 한다지만 이를 밑돌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다. 석유공사의 한 관계자는 “알짜 자산까지 다 팔아 빚을 메우라는 얘기도 있는데 자산을 매각하면 공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토로했다. 재무 개선을 위해 보유 자산을 시장에 전부 내놓으면 비상 자원을 확보해야 할 석유공사의 존재 가치가 사라진다는 얘기다. 자원 개발 TF가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은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TF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지원을 유보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TF의 권고안을 검토해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석유공사에 실제 지원이 필요한지, 필요하다면 비용이 얼마나 요구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예산 책정 과정에 관여한 복수의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예산 편성 과정에 자원 개발을 ‘적폐’로 보는 정치 논리가 상당 부분 작용하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국과장급 실무선에서는 석유공사에 대해 일정 부분 지원이 필요하다는 데 큰 이견이 없다”면서도 “실제 예산을 투입하기 위해서는 ‘윗선’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귀띔했다. 다른 관계자는 “자원 개발 사업이 전 정권에서 주도한 일이다 보니 관련 공기업을 지원하는 예산 확보가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석유공사의 사례뿐 아니라 정부가 그간 편성한 예산안을 보면 자원 개발에 거리를 두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정부는 2017년 민간 기업의 해외 자원 개발 융자 지원 예산으로 1,000억 원을 편성했다. 이후 2018년에는 700억 원으로 삭감했고 2019년과 2020년에는 절반 수준인 300억 원대로 줄였다. 내년에는 688억 원으로 관련 예산을 늘리기는 했지만 2016년 전까지 ‘성공불융자’라는 이름으로 한 해에 4,000억 원 넘는 예산이 편성된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낮은 수준이라는 평가가 많다.
국회 일각에서 예산 심의 과정에서 공사 지원 사업을 추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지만 의견이 실제 반영될지는 미지수다. 내년 예산이 정부안대로 확정되면 석유공사의 재무구조 개선 문제는 결국 다음 정권에서 떠안아야 한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자원 공기업 문제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면서도 “광물자원공사가 파산 직전에 내몰려서야 광해관리공단과 통합해 위기를 넘겼던 것처럼 석유공사 문제도 곪을 대로 곪은 뒤에야 손을 대지 않을까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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