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사정이 딱하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는데도 무력하기만 하다. 미국·영국·독일 등이 러시아와 연쇄 회담을 하는 와중에도 정작 우크라이나의 자리는 없다. 자신의 명운을 남에게 철저히 의탁해야 하는 처지다. 아마도 우크라이나는 시간을 부다페스트 조약을 맺었던 지난 1994년으로 되돌리고 싶을 것이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세계 3위 핵무기 보유국이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냉전시대에 배치돼 있던 핵무기를 떠안은 상태였다. 하지만 3년 뒤 부다페스트 조약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포기했다.
핵무기를 러시아로 넘기고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하면 미국·영국·러시아 등 국제사회가 우크라니아 국경에 대한 주권을 인정한다는 게 조약의 뼈대였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외부 공격이 발생하면 유엔이 나선다는 내용도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뒤인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하자 정작 미국 등은 우크라이나를 외면했다. 국제정치의 냉혹한 힘의 논리에 부다페스트 조약은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헝가리·폴란드 등 동구권 국가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가입을 서둘렀다. 과거 구소련에 속했던 국가들의 나토 가입이 폭주한 데는 그만큼 러시아의 위협이 컸기 때문이거니와 그나마 나토 가입국에 대한 집단안전보장 체제가 무슨 무슨 조약이나 협정보다 훨씬 실속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현재의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해보자. 과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지금처럼 ‘공포의 도박판’을 벌일 수 있을까. 핵무기를 지렛대로 써먹을 수 있는 우크라이나는 현재의 위상과는 천양지차일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한반도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최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다시 바빠졌다. 북한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3월 한국 대선을 앞두고 연일 미사일을 쏴대고 있다. 조만간 북한이 7차 핵실험을 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쏜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김정은은 우크라이나를 비웃고 있을 것으로 본다. 핵무기를 포기한 뒤 러시아 침공에 속수무책인 것도 모자라 운명을 건 담판에는 아예 끼지도 못하는 우크라이나가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을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아마도 김정은은 ‘핵을 고수하고 있는 자신의 선택이 옳다’고 느끼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김정은은 살벌하기까지 한 국제정치의 생리를 꿰뚫고 있다.
이번에는 우리를 한번 둘러보자.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말까지도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란 ‘희망 회로’를 돌리고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임기 말 한가로이 중동을 방문했던 지난 17일에도 북한은 여봐란듯이 미사일을 쏘았다.
이번 정부가 그토록 집착한 종전선언·평화협정 같은 것은 부다페스트 조약을 보면 신기루와 다를 게 없다.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폼은 날지언정 현실 정치에선 그 어떤 것도 담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의 착각은 끝이 없다. 문서에 사인만 하면 진짜 북이 핵을 포기할 것이란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미국·일본 등이 한목소리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규탄하고 있음에도 당사국인 우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굴고 있다. 마치 28년 전 우크라이나의 선택이 오버랩될 만큼 답답한 노릇이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결국 우리도 핵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평화는 적을 압도할 강한 힘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지 “평화냐, 전쟁이냐” 하는 허울뿐인 정치적 레토릭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리더는 적만큼이나 해롭다. /sh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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