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도시의 토지는 주거·상업·공업·녹지 지역 중 하나로 정해져 있다. 도시의 모든 토지를 용도로 구분해 관리하는 용도지역제는 1962년 제정된 도시계획법에서 출발한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건축 행위와 도시 개발을 정해진 용도와 밀도로 관리하는 도시계획의 근간이다. 세계 대부분의 도시에서 운영되고 있는 용도지역제는 산업혁명을 반영한 ‘근대 도시’를 상징하는 도시계획 제도다.
디지털 전환 시대에 우리 도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기존 도시계획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있었지만 생산과 소비 영역을 구분하고 중심지와 주거지를 분리하는 용도지역제는 아직 그대로다.
역사적으로 급격한 기술 전환과 사회 변화의 시기에 도시의 혁신이 등장했다. 산업혁명을 주도한 경험이 있는 세계 주요 도시들은 지속 가능한 발전과 앞으로의 경쟁에서도 앞서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도시 생산 생태계 거점을 전통적인 용도지역제가 아닌 특별한 도시계획·설계를 도입해 조성하고 있다. 미국 보스턴의 혁신지구, 뉴욕의 허드슨야드와 배터리파크시티 특별도시설계구역이 그 사례다. 더욱 혁신적이고 유연한 도시계획 제도를 적용한 싱가포르는 사전에 용도지역을 지정하지 않는 백지용도지구(white zoning)로 마리나베이를 개발했다. 영국 런던도 첨단 금융 핀테크 산업을 선점하기 위해 총리가 앞장서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해 테크시티를 조성하고 있다. 도시의 미래가 또다시 이들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현재의 용도지역제로는 실현이 불가능한 사업이다. 도시 생산 생태계로 적합한 거점 지구에 창조적 인력들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고 새로운 산업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특별한 도시계획·설계를 적용하고 있다. 업무와 연구개발, 생산 및 제작의 전 과정 그리고 판매와 주거 등이 필요한 모든 용도의 혼합과 함께 새로운 용도와도 쉽게 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시간별로 다른 용도로 전환할 수 있는 입체적 토지이용도 실현 가능하다. 또한 개발 이익과 증대된 세수를 주택 등 당면한 도시 문제를 해결하는 공공 재원으로 활용하는 체계도 갖추고 있어 시민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다.
우리 도시의 시대적 과제는 분명하다. 디지털 전환과 스마트 도시를 통해 과거 도심에서 밀려났던 생산 기능을 첨단 산업으로 전환해 활력 넘치는 도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살고, 일하고, 여가 문화가 어우러져 교육과 산업을 촉진하는 융·복합적인 도시 생태계를 조성해 창조적 혁신의 기반을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한 시작으로 용도지역제의 합리적 변화와 특별한 도시계획·설계 제도 도입이 필요하다. 이전 산업혁명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우리 도시들이 디지털 전환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새로운 ‘세계 표준’을 주도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의 개정이 더욱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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