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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병 어루만진 붓질…아무도 아프지 않기를

[예술,K메디치를 만나다]

코오롱 스페이스K 첫 젊은작가 전시

이근민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展

병적 고통·극복 과정 그림에 담아

폭10m 초대형 유화 등 31점 선봬

이웅열 명예회장 "예술의 기쁨 나누자"

작가 발굴, 현대미술 저변확대 앞장

코오롱의 미술관 스페이스K에서 열리고 있는 이근민 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전시 전경. /사진제공=스페이스K




물컹하고 붉은 내장 같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피 비린내 같은, 사체 썩는 냄새가 나기도 했다. 역겨워서 밥을 입에 넣기조차 힘겨웠다. 심지어 그릇 부딪히는 소리만 들어도 구역질이 났다. 서울대 서양화과 1학년이던 2001년, 화가 이근민(40·사진)은 신경증과 불안장애가 환각·환후까지 일으켜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공황장애가 뒤섞인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수개월 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다시 붓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은 이듬해 여름부터였다. 아플 때의 기억을 그림으로 끄집어냈지만, 괴롭지는 않았다.

“아팠던 순간은 힘들었어도, 지독한 거부감으로 남지는 않아서 그림으로 그리는 게 가능했습니다. 남들에게 (병증을) 말할 때도 크게 신경 안 쓰려 합니다. 경험이 뇌 속에서 곱씹혀, 재생산되는 과정 속에서 기억의 진화가 일어나는 것 같아요. 그 기억의 재현도 있지만, 그림에 어울리는 ‘도구’로 새롭게 발전시켜 그리기도 합니다.”

코오롱의 미술관 스페이스K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근민 작가가 작품 ‘문제구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스페이스K


코오롱(002020)그룹이 운영하는 서울 강서구 마곡동의 미술관 스페이스K에서 이근민의 대규모 개인전 ‘그리고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가 5월18일까지 열린다. 폭 10m의 초대형 유화를 포함해 드로잉까지 총 31점이 선보였다.

장기들을 끄집어 내놓은 듯, 정육점의 쇼윈도 같은 붉은 기운이 전시장에 가득하다. 빈센트 반 고흐의 황금처럼 빛나는 노란색은 약물 중독으로 인한 황시증과 무관하지 않았고, 쿠사마 야요이는 환각으로 경험한 동그란 점 문양의 반복을 그대로 그림에 담았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일부러 미친 사람인 척 했다고 하니, 정신질환이나 신경증은 고통 속에 핀 꽃처럼 작가에게 남다른 밑천이 되기도 한다.

이근민의 '심장과 남근' /사진제공=스페이스K


상처 가득한 육신과 흘러나온 피, 비정상적으로 거대해진 성기가 등장하는 작품 ‘다친 바보(Injured Dumber)’는 피해망상 때문에 봉인된 욕망이 괴물처럼 변한 듯한 형상을 마주하게 한다. ‘피해망상의 배열(Paranoia Sequence)’은 분노에서 시작해 자책으로 끝맺는 피해망상의 단계적 과정을 담은 연작이다. 단순히 개인의 불안·감정을 분출한 작품은 결코 아니다. 의사가 진단코드로 사람을 분류해버리는 폭력적 상황을, 병증 환자를 비정상인으로 몰아버리듯 억지스럽게 상처를 덮으려는 봉합 수술의 장면 등을 통해 효율성만 중시하는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한다. 밑그림 없이 그리는 작가는 자동기술법(automatisme)으로 그리는 것 같지만 화면은 나름의 짜임새 있는 구조를 갖는다. 자신을 향한 주변의 칼날같은 시선을 오히려 캔버스를 향한 날렵한 붓질로 승화했다. 가해자와 고통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특히 탁월하다. 크로테스크 분위기로 독보적 작업세계를 형성한 이근민은 미국의 미술전문지 ‘아트포럼’과 ‘아트인 아메리카’ 등에서 주목 받으며 해외에 먼저 이름을 알렸다.

이근민 '피해망상의 배열' /사진제공=스페이스K




이근민의 '엉켜버린 기억' /사진제공=스페이스K


이근민 '환각다듬기' /사진제공=스페이스K


이근민의 '수술' /사진제공=스페이스K


전시를 기획한 이장욱 스페이스K 수석 큐레이터는 “이근민에게 회화는 병적 고통과 진단이 가져온 억압을 해방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면서 “개인중심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우리는 나와 다른 존재들을 끊임없이 구분했고, 이로 인해 아프지만 아프다고 이야기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이나 ‘나는 아플 리 없다’는 자기 합리화가 생겨난 상황에서 이근민의 작품은 비장한 의미를 갖는다”고 소개했다. 이 큐레이터는 이성복 시인의 시구절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에서 이번 전시 제목을 차용했다.

스페이스K 전경 /사진제공=스페이스K


이곳 스페이스K개관을 주도한 이웅열 코오롱 명예회장은 영화광이며 만능 스포츠맨으로 유명하다. 사원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지역민과도 예술의 기쁨을 나누고 싶어 1998년부터 과천 사옥에서 클래식·뮤지컬· 마술쇼 등의 공연행사를 10년 이상 진행했다. 2011년부터는 과천 본사 로비에 전시공간을 열었고, 서울 강남의 코오롱모터스를 비롯해 광주, 대구, 대전 등지로 확장했다. 약 10년간 총 152회 전시로 437명의 작가를 후원해 매년 2만여 명이 관람하는 지역 명소가 됐고, 마곡동 ‘스페이스K’를 개관하는 동력이 됐다.

건축과 설계는 2014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조민석 매스스터디스 소장이 맡았다. 코오롱그룹은 약 105억 원을 들여 건립한 미술관을 서울시에 기부채납했고 20년간 운영하기로 했다. 2020년 9월 개관 이후 네오 라우흐·헤르난 바스·라이언 갠더 등 세계적 작가들의 전시가 열려 척박했던 서울 서남권의 문화 거점이 됐고, 이른바 ‘인스타성지’로 부상했다. 이근민 개인전은 이곳에서 처음 열린 국내 젊은 작가의 전시다. 스페이스K는 국내에서 보기 어려운 해외 작가 전시와 국내 신진·중견작가 발굴 및 전시 기회 제공을 동시에 추구하는 쌍끌이 전략을 통해 코오롱의 차별화된 예술사회공헌 활동을 지향한다. 궁극적 목표는 현대미술의 저변 확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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