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없어지면 추억도 사라집니다. 을지면옥이 다른 곳에서 장사를 이어가더라도 이곳에서 냉면과 수육을 안주 삼아 소주 한잔 걸치던 시민들의 추억을 온전히 되살리기 힘들 겁니다.”(서울 성북구 거주 박 모 씨)
지난 25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중구에 위치한 을지면옥 입구가 입장을 기다리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오전 11시인 영업시간이 꽤 남아 있음에도 10여 명 이상의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눴다. 시민들은 입구에 전시된 사진을 보며 을지면옥의 역사를 되새기는가 하면 이곳에서 있었던 과거 추억을 꺼내 자랑하기도 했다. 을지면옥이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했다는 김 모(64) 씨는 “여기서 먹은 냉면만 100그릇은 족히 될 것”이라며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이 공간을 다시 기억하고 싶어 찾았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5대 평양냉면’으로 불리며 을지로에서 37년 간 장사를 이어온 ‘노포(老鋪)’ 을지면옥이 25일 마지막 영업을 했다. 법원이 세운상가 재개발 사업 시행사에 건물을 인도하라고 명령하면서 을지면옥은 지난 며칠 간 폐점 절차을 밟아 왔다. 지난해 ‘노맥(노가리와 맥주)’의 원조 격인 ‘을지OB베어’가 사라진 데 이어 오랜시간 을지로 골목을 지켜온 노포들이 연이어 사라지는 모양새다.
이날 을지면옥이 폐점한다는 소식을 듣고 모인 단골들과 시민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서울 종로구에 거주하는 김 모(58) 씨는 “처음 을지면옥을 방문한 게 20년은 된 것 같다”며 “처음엔 친구들과 지금은 가족들과 방문하고 있었는데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고 말했다. 경기 부천시에서 찾은 한 단골 손님 역시 “같은 장소에서 37년을 영업했다면 사실상 문화유산이나 다름없다"면서 “보존해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을지면옥뿐 아니라 한국의 노포들은 점차 스러지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가게 운영이 어려워지거나 재개발 사업에 밀려 강제로 가게를 떠나는 경우도 있다. 노맥 문화의 원조로 알려진 을지OB베어도 ‘2015 서울미래유산’에 선정되는 등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가게였지만 올해 4월 건물주와의 명도소송 끝에 사라졌다.
실제 중소기업벤처연구원이 2018년 전국사업체조사를 바탕으로 통계분석을 실시한 결과 전체 317만여 소상공인 중 업력이 30년 이상인 곳은 11만개로 3.5%에 불과했다. 50년 이상 가게를 운영한 소상공인은 2500여개, 100년 이상은 27곳에 그쳤다.
시민들은 정부가 진행하는 재개발 등의 사업들과 노포들이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다고 입을 모았다. 은평구에 거주한다는 이 모(41) 씨는 “재개발도 물론 중요하지만 단순히 경제논리에 따라 강제적으로 집행하는 문화가 지속된다면 한국의 음식문화는 발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광진구에 거주하는 서 모(60) 씨는 “인근의 을지OB베어도 그렇고 노포들이 재개발에 밀려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며 “기존 공간을 살리면서 도시를 개발하는 방법도 있을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현재 을지면옥 소유주가 소유한 건물을 제외한 세운 3-2구역은 모두 철거된 상태다. 건물 철거가 완료되면 해당 지역에는 20층 높이의 오피스 빌딩이 세워질 예정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