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선선해진 밤공기를 맡으며 산책하다 보면 가을이 코앞에 다가왔구나 싶다가도 여전히 30도가 넘는 한낮의 햇볕을 마주할 때는 8월이 채 끝나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쨍쨍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을 하루에 모두 겪다 보면 이솝우화 중 하나인 ‘북풍과 태양’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그네의 옷 벗기기 내기를 두고 강한 바람으로 성급하게 옷을 벗기려 한 북풍이 지고 따뜻한 햇볕을 계속 내리쬐어 나그네가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든 태양이 이겼다는 우화 말이다.
국내 시가총액 상위 200대 기업 중 지난달 말까지 지속 가능 경영 보고서를 발간한 회사는 총 151곳으로 75.5%에 달한다. 의무가 아닌 자율 공시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보고서를 거래소에 제출하는 기업이 매년 늘어나고 있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에 대한 기업의 관심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은 기업이 지속 가능 경영 보고서 발행 및 공시 여부를 선택할 수 있지만 2025년부터 자산 총액 2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시작으로 단계적 의무화가 진행된다. 2030년에는 모든 코스피 상장사가 공시 의무를 지게 된다.
ESG 공시 의무화 움직임은 유럽연합(EU)과 미국에서 출발했다. ESG 경영이 국제적 어젠다로 급부상한 시장 환경을 반영한 정책적 흐름이었다. 그러나 ESG 관련 정책의 선두 주자 격인 EU와 미국도 ESG 공시 제도를 재검토하고 있다. 재계가 공시 기준의 모호함과 기업공시 부담 등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하며 반발한 때문이다. 재계의 의견을 수용한 EU는 기업 자율성을 강화한 지속 가능성 보고 표준 수정안을 공개해 집행위원회 심의를 마쳤고 미국은 10월을 목표로 했던 증권거래위원회(SEC)의 기후 공시 규칙안 발표가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글로벌 스탠더드가 부재한 상황에서 ESG 공시 의무화 방안이 국내에 도입된 것은 성급한 결정이다.
과도한 규제로 인한 짐은 결국 기업이 지게 된다. 국내 상장사 다수가 지속 가능 경영 보고서를 자발적으로 공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단일화된 기준이나 가이드라인이 없어 보고서를 작성할 때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최근 수년간은 기업 지배 구조 보고서와 환경 정보 공개, 영문 공시 등 상장사를 대상으로 한 의무 공시가 무차별적으로 급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속 가능 경영 보고서까지 공시가 의무화된다면 기업의 부담은 한층 커질 수밖에 없다.
‘북풍과 태양’ 이야기는 빨리 서두르는 것보다 천천히, 꾸준히 하는 것이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ESG 공시도 마찬가지다. 의무화를 서두르기보다 자율 공시로 천천히 기틀을 다져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불어 공시를 훌륭히 이행한 기업에 인센티브라는 햇볕을 쬐어준다면 굳이 공시를 의무화하지 않아도 기업은 자발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결국 승자는 태양이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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