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1905~1944)은 빼앗긴 조국의 미술사를 개척하는데 짧은 생을 모두 바쳤다. 그의 미술사 연구 그 자체만큼이나 그를 연구하는 것이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이유다.
저자 이원규는 김원봉, 조봉암, 김경천 등 우리에게 완벽하게 잘 알려지지 않은 민족 혁명가들의 삶을 생생한 문체로 써 온 작가다. 이번 ‘고유섭 평전’은 저자가 3년 전 인천문화재단의 요청으로 집필한 약전을 계기로 시작됐다. 저자는 고유섭이 구축한 거대한 업적에 비해 연구서와 논문이 적고, 대중에게서 점차 잊혀지고 있는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그의 평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개항도시 인천에서 태어나 일찍 근대 문물을 접한 고유섭은 열 살 무렵부터 조선미술사를 소망한다. 일본보다 우수한 조선의 미술을 찬양한 일본인 미술 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와 민족 예술에 집착한 인천 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아 조선미술사를 조선인이 열어가야 할 미개척 분야로 여겼다. 민족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20년 경성의 사립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경성제대를 거쳐가며 더욱 커진다. 그는 경성제대 철학과에서 미학을 전공했는데, 당시 미학 전공자는 고유섭 한 명 뿐이었다. 저자는 고유섭이 미개척 분야인 미학의 기초를 쌓고 조선미술사 연구를 개척하기 위해 이같은 도전을 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책에는 고유섭이 담당 교수인 우에노 나오테루 교수와 단 둘이 독일어 원서를 놓고 강독 수업을 하는 모습이 생생히 그려진다.
졸업 후 고유섭은 규장각 문헌 등 고문헌에서 미술사 자료를 분석해 아카이브를 만들기 시작한다. 특히 반가상의 양식과 흐름을 분석하는 논문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을 발표한 이후부터 미술사 연구의 유일무이한 지식인이 되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책은 연대기 순으로 그의 연구를 정리한다. 학계는 고유섭이 남긴 연구 성과 중 탑파 연구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고유섭은 삼국시대부터 1000년 간 탑의 변천 과정을 정확히 짚어내 탑파 연구에 두각을 드러낸 일본인 연구자들을 넘어섰다. 39세의 나이에 요절한 그는 말년에 병마와 싸우면서도 일본어 원고를 써가며 조선 미술사를 완성하겠다는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의 미술사 연구는 해방 이후 반드시 해야 할 과업 중 하나다. 지배하는 나라는 언제나 그렇듯 그 나라의 정기가 될 만한 자료를 없애고 빼앗기 일쑤기 때문이다. 고유섭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최고 수준으로 그 일을 해낸 인물이다. 한편으로 고유섭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저자는 고유섭을 ‘민족의 문화예술을 지키고, 한국 미술사를 정립한 지식인’으로 평하며 더 널리 알려져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2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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