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종양일 가능성은 낮지만 종양이 단단해서 수술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안과 협진을 통해 눈이나 코로 종양 제거 수술을 진행할 수는 있습니다.”
베트남 국적의 레민 하오(26) 씨는 서울아산병원의 외국인 환자 통합 플랫폼 VCB(Virtual Care Board)를 통해 정유삼 이비인후과 교수의 소견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오 씨가 부랴부랴 원격으로 서울아산병원의 문을 두드린 것은 한 달여 전 코막힘 증상으로 현지 병원을 찾았다가 자기공명영상(MRI) 검사에서 오른쪽 비강의 종양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내시경으로 종양 제거 수술을 받고 한시름 놓으려던 찰나 추적 검사에서 잔류 병변과 안와 침범이 확인됐다. 설상가상 병리조직검사 결과를 두고 현지 병원 두 곳의 진단이 연골육종(악성)과 섬유성 골 이형성증(양성)으로 갈리면서 혼란이 더욱 커졌다. 하오 씨가 서울아산병원의 VCB 시스템을 통해 조직병리검사 판독을 의뢰하고 원격 상담을 거쳐 외래 진료와 정밀 검사를 받기까지 소요된 기간은 20일 남짓. 그로부터 두 달 뒤 서울아산병원에서 이비인후과·안과 협진을 통해 눈 뼈 부위로 침범한 종양과 뼈의 일부를 제거하고 인공뼈를 삽입하는 수술을 받았다. 서울아산병원은 하오 씨가 귀국한 뒤에도 비대면 진료를 통해 경과를 관찰하고 있다. 현지 병원에서 받은 영상 검사를 토대로 2명의 집도의가 동시에 원격 상담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9일 의료계에 따르면 비대면 진료가 외국인 환자를 유치하는 새로운 채널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아산병원의 경우 올 2월 시작한 ASAN-VCB 시스템으로 두 달여 만에 외국인 환자 상담 건수가 1100건을 돌파했다. ASAN-VCB는 해외 환자 대상 접수부터 검사 자료 등록, 사전 상담, 원격진료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효율적으로 제공해 이용자들의 만족도가 높다. 환자가 현지 병원에서 시행한 영상 검사나 혈액검사 자료를 직접 업로드할 수 있도록 해 편의성도 높였다. 특히 광학문자인식(OCR) 기반의 인공지능(AI) 자동 번역 기능이 작동해 다양한 언어의 문서가 한국어 또는 영어로 자동 변환돼 진료 정확도를 높여준다.
전인호 서울아산병원 국제사업실장(정형외과 교수)은 “해외에서도 짧게는 1주일, 길게는 2주 이내에 영상의학과 전문의의 판독을 거쳐 전문 의료진의 원격 상담을 받을 수 있다”며 “현재 영어권·러시아권·몽골어권 환자 비율이 높고 아랍어권·중국어권·베트남어권 등 다양한 언어권의 환자 유입이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비대면 진료뿐 아니라 즉각 외래를 희망하는 환자들도 늘어 해외에서 내원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서울아산병원은 외국인 환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병원 중 하나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잠시 주춤했던 외국인 진료가 VCB 플랫폼 운영과 함께 회복세로 돌아섰다. 디지털 플랫폼을 통한 비대면 진료를 기반으로 외국인 중증 환자 유치의 선순환 모델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전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나 메이요클리닉 등이 추진하는 분산형 의료 시스템과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며 “디지털 기반 원격진료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 한국 의료의 강점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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