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이 이달 16일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비공개로 만나 양국 간 조선 산업 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한다. 미국 측의 요청으로 성사된 이번 만남에서 정 수석부회장은 상선 및 군함 건조, 유지·보수·정비(MRO) 분야의 협력뿐 아니라 조선·전력 기자재에 대한 관세 완화 등을 아우르는 투자 협력 패키지를 제안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면담의 결과가 같은 날 열리는 그리어 대표와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간 고위급 통상 협의에서 한미 조선 협력을 가속화하고 관세 협상 합의를 이끌 지렛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나온다.
15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통상장관회의 참석차 방한한 그리어 대표가 이달 16일 오전 정 수석부회장과 비공개 면담을 가질 예정이다. 미국 측은 그리어 대표의 방한에 앞서 HD현대 측에 별도의 면담을 요청했고 정 수석부회장이 이를 수락하면서 만남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비공개 면담이 주목되는 이유는 미국의 통상 협상을 이끄는 고위 당국자와 기업의 실질적인 의사 결정 권한을 가진 총수가 직접 만난다는 데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최근 미국 고위 인사들과 접촉하며 대미 경제외교의 최전선에 서고 있다. 지난달 30일 존 펠런 미 해군성 장관이 울산 HD현대중공업(329180) 본사를 방문할 때 직접 안내하며 방산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정기 검사를 위해 야드에 들어온 최신 이지스 구축함 ‘정조대왕함’의 주요 성능과 특징을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펠런 장관은 정조대왕함을 꼼꼼히 둘러본 뒤 건조 중인 다른 함정들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며 당초 예정된 1시간 30분보다 약 30분 더 머물렀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번 비공개 면담에서 지난달 한미 2+2 통상 협의에서 제시된 조선 협력 방안보다 더 폭넓고 구체적인 방안이 논의될 가능성 또한 제기된다. 정 수석부회장의 최근 대미 경제외교 행보는 그룹 차원의 전략과도 맞물려 있다는 지적이다. HD현대는 조선 외에 방산, 발전 기자재, 친환경 엔진, 수소 해운 솔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 시장과 맞닿아 있다. 실제 이번 회담에는 HD현대 계열사인 현대일렉트릭 관계자도 동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내 노후 송전망 교체 수요에 대응해 한국 기술의 경쟁력을 강조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어 대표가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을 만날지 여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리어 대표는 이달 16일 김희철 한화오션(042660) 대표와도 별도 면담만 예정돼 있다. 하지만 한화오션은 HD현대와 함께 특수선 양강으로 꼽히며 미국 측에서도 두 기업 모두를 전략적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다. 한화오션은 지난해 8월 국내 조선소 최초로 국 해군 군수 지원함 ‘월리 쉬라’호 MRO 사업을 수주해 이를 성공적으로 인도했다. 지난해 12월에는 한국 기업 최초로 미국 필리조선소를 인수했다. HD현대 역시 지난달 미국 최대 방산 조선사 헌팅턴잉걸스와 ‘선박 생산성 향상 및 첨단 조선 기술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그동안 중국의 최대 경쟁국이자 세계 1위 조선 경쟁력을 지닌 한국과의 산업 협력을 강조해왔다. 일각에서는 그리어 대표와 정 수석부회장의 면담이 성사된 만큼 경쟁사인 한화그룹 측에서도 김 부회장이 배석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번 면담의 결과가 미국 통상 당국의 관세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고 있다. 특히 이번 회동이 미국 측의 요청으로 이뤄진 데다 한미 고위급 통상 실무 협의 직전에 개최된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정책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 관계자는 “조선업은 미국 내에서 사실상 기반이 약해진 산업이기 때문에 미 정부 인사들이 국내 조선 업계와의 접촉을 지속적으로 늘리고 있다”며 “그 과정에서 정책과 산업을 연결하는 민관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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