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실리콘밸리에서 여러 인공지능(AI)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VC)을 만났다. 도널드 트럼프발 관세도 강력한 태풍이지만 AI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핵폭탄급 태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세는 환율, 수요 공급 등 경제 상황과 협상으로 그 파급효과 조절이 가능하나 AI는 기초 기술과 경제사회구조의 기본 틀을 바꾸는 거대한 흐름으로, 뒤처지면 영영 만회가 어렵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현재의 AI 글로벌 레이스에서 한국은 패싱되고 있다. 캐나다·프랑스·영국 등이 미국과 중국 다음으로 AI 존재감을 보이고 있다. 대만은 아시아의 ‘AI 허브’를 지향하고 아랍에미리트(UAE)는 막대한 오일머니를 AI 칩에 투자하며 오픈AI와 소프트뱅크의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능가하려 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투자자는 “한국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감축이 이곳의 한국 관련 프로젝트에도 영향을 미쳤다”며 “몇 년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며칠 후 새 정부의 출범은 한국의 AI 정책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다.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과 공급망 충격 와중에 출범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100여 일 만에 백악관 주도의 민관 작업을 거쳐 공급망 보고서를 발표했던 것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임기 중 현실화한 반도체지원법(CHIPs Act)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의 뼈대가 다 들어 있었다. 또 구글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던 에릭 슈밋을 의장으로 AI국가안보위원회를 구성해 AI 정책을 주도했다.
한국에도 기회는 있다. 한 투자자는 최근 “‘대만도, 중국도 아닌(No Taiwan, No China·NTNC)’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고 전했다. 한국이 미국에서 새로이 형성되고 있는 AI 생태계에서 미국의 빈 곳을 보완할 수 있는 비교우위에 선택과 집중을 한다면 가능성이 있다. 피지컬 AI, 휴머노이드, 소비자와 접점에 있는 응용 기술, 한류 콘텐츠 등이 좋은 사례다. 중국은 AI 기초·응용 기술에 제조까지 모두 강해 파트너가 필요 없으나 미국은 압도적인 AI 기초 기술에 반해 응용 기술과 제조에서는 한국 같은 파트너가 필요하다.
실리콘밸리의 투자자들은 한국 스타트업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미국에 진출할 경우 한국에 초점이 맞춰진 기술과 모델을 미국 시장에 맞게 바꾸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찬호가 초기부터 메이저리그로 와서 훈련받고 커나갔듯 아예 될성부른 스타트업들은 미국에서 시작해 미국, 일본,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등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할 것을 제안했다. 이들은 “한국은 너무 다르다”며 갈라파고스적 규제를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새 정부의 ‘AI 100일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한국의 AI에 대한 해외의 고정관념을 흔들어놓을 과감한 서프라이즈가 필요하다. 실리콘밸리의 외국인 전문가에게 민관 합동의 AI위원회를 맡기자. 철저히 해외 시각에서 규제 개혁 방안을 내게 하고, 이 중 70~80%만이라도 과감하게 채택해 실행하자. AI 분야의 ‘박찬호 스타트업 모델’을 만들고 해외에서 대박 난 ‘AI 아이돌’을 미래의 워런 버핏과 손정의로 키워야 한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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