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의료기기 회사들이 뛰어난 기술력과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중동 시장을 적극 공략하고 있다. 임플란트·미용 의료기기부터 의료 인공지능(AI)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제조업 기술에 AI와 정보기술(IT)을 접목시켜 ‘제2의 중동 붐’ 초석을 닦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지정 혁신의료기기가 100개를 넘어서는 등 물오른 기술력을 토대로 중동에서 사업 저변을 넓혀 나가는 모습이다.
1일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중동 지역(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 기준)의 국내 의료기기 수입 규모는 2020년 2961만 달러에서 2024년 7555만 달러로 최근 5년 새 155% 급증했다. 2021년 이후 국내외 진단기기 수요가 급감했음에도 중동지역 의료기기 수출 규모는 꾸준한 상승세를 이어오고 있다. 올해 1~4월 수출액은 3808만 달러로 전년 동기 2472만 달러를 앞질렀다.
임플란트 판매량 세계 1위 기업인 오스템임플란트는 지난해 사우디아라비아 연락사무소를 신설했고 10월에는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직판 영업 체제를 본격 가동했다. 회사 관계자는 "현재 중동법인을 중심으로 중동 및 아프리카 지역 30여 개 국가에 딜러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GC지놈은 최근 UAE 의료기기 유통업체 '볼워트 메디컬 LLC'와 비침습산전검사 '지니프트'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비슷한 시기 피부미용 의료기기 기업 원텍(336570)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레이저 장비 ‘브이 레이저’ 허가를 획득했다.
K의료기기는 중동에서 미국·유럽 제품 대비 뛰어난 품질과 가격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다. 올 초 공사·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발행한 '중동 의료 허브, UAE 의료기기 시장 동향과 진출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중동 의료기기 산업은 주사기 등 기초 장비에 집중돼 있다. 풍부한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낙후된 의료시설 및 장비를 교체하는 사업들을 진행 중이만 제조기반이 부족한 탓에 대부분의 중동 국가들은 의료기기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 산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헬스케어 산업을 국가 전략 산업으로 키우고 있는 점도 한국 기업들에게 기회 요인으로 꼽힌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가 전략과제 ‘비전 2030’의 일환으로 헬스케어 디지털 혁신을 위한 ‘헬스케어 샌드박스’ 사업을 추진 중이다. UAE는 ‘산업전략 2030’에 6대 육성 제조업 분야 중 하나로 제약·의료기기를 포함시켰다. 특히 중동은 한국 의료 AI 기업이 진출하기 우호적인 환경으로 평가된다. 해당 보고서는 "UAE가 'AI 국가 전략 2031'을 통해 의료 부문에서 AI 기술 활용을 촉진하고 있다"며 "AI 기반 진단 시스템과 맞춤형 의료 솔루션을 개발해 중동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지난해 기준 UAE 의료기기 시장에서 가장 큰 수입 비중을 차지한 제품군은 AI 기반 진단 영상 장비였다. 의료 AI 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전자의무기록(EMR) 보급률이 높고 IT 전문성도 높아 의료 AI 솔루션 개발에 유리한 환경을 갖췄다는 현지 평가를 받는다"고 귀띔했다.
의료 AI 기업 루닛(328130) 올 1분기 역대 최대 매출액을 기록한 데는 중동에서의 매출이 주효했다. 루닛은 올 1분기 연결 기준 매출이 192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74% 뛰었다. 그 중 해외 매출이 180억 원에 육박해 전체 매출의 93%를 차지했다. 올 초 사우디아라비아 최대 민간 의료기관인 ‘술라이만 알-하빕 메디컬 그룹(HMG)’과 체결한 흉부 엑스레이 AI 영상 분석 솔루션 ‘루닛 인사이트 CXR’ 공급 계약 관련 수익이 1분기 실적에 반영됐다. 회사 관계자는 "HMG는 지난해 ‘루닛 인사이트 MMG’ 공급 계약을 맺은 데 이어 루닛 제품의 임상적 유효성과 의료진 업무량 감소 등을 직접 경험한 후 만족도가 높아 올해 1분기에 추가 구매를 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의료 AI 등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의 성장세는 가파르다. 식약처가 발표한 ‘2024년 국내 의료기기 생산·수입·수출 실적’에 따르면 디지털의료기기의 수출액은 2023년 2억 3000만 달러에서 지난해 3억 3400만 달러로 45.4% 증가하며 두드러진 성장세를 나타냈다. 의료기기 업계 관계자는 "UAE는 세계적인 의료관광 허브로 자리잡고 있는 만큼 성장 잠재력이 크다"며 "중동 지역은 아프리카·유럽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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