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신약 심사 결과 거절된 이유가 담긴 문서 수백건을 전격 공개했다. 의약품 인허가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로 전 세계 의약품 규제기관 중 처음이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는 “신약 개발 및 승인 과정의 오답 노트가 될 수 있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반면 국내 규제기관인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각 국의 규제환경이 다른 만큼 좀 더 지켜봐야 한다”며 신중한 입장이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FDA는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제출된 의약품 및 생물의약품 허가 신청에 대한 ‘완전응답서’(CRL·Complete Response Letters) 202건을 10일(현지 시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CRL은 이미 승인된 제품에 대한 과거 문서로 기밀 정보와 영업 비밀은 삭제됐다. FDA는 앞으로 아카이브에 보관된 다른 CRL도 순차 공개할 예정이다.
CRL는 FDA가 의약품 허가 신청서를 검토한 뒤 현재 상태로는 승인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기업에 발송하는 공식 문서다. 의약품의 안정성 및 유효성 문제, 제조 공정의 결함, 생물학적 동등성 문제 등 다양한 이유로 발송된다. CRL에는 구체적인 승인 거절 사유와 함께 신청자가 해결해야할 개선 사항 및 권고 사항이 담긴다. 마티 마커리 FDA 국장은 “제약사들은 너무 오랜 기간 FDA의 허가 과정에서 일종의 ‘추측 게임’을 해왔다”며 “이번 조치는 혁신적인 치료제를 더 빠르게 환자에게 전달하는 데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FDA는 그동안 CRL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신청 기업에게만 전달했다. 내용이 공개되지 않다 보니 CRL을 받은 기업이 시장에 허가 거절 이유를 왜곡하거나 축소해서 전달한다는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2015년 FDA 내부 연구에 따르면 기업들은 CRL 발표 시 FDA의 안전성 및 유효성 우려 중 85%를 공개하지 않았고, 추가 임상시험 요구 사항에 대해서도 약 40%는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CRL을 공개함에 따라 일반인들도 FDA의 의사결정 과정과 허가 거절의 주요 사유에 대해 알 수 있게 됐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는 FDA의 이번 조치를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관계자는 “신약은 수많은 실패와 개선을 통해 완성되기 때문에 좋은 오답 노트가 될 수 있다”며 “신약 파이프라인 보유 전 세계 3위 국가인 우리나라 신약개발에도 촉매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면 규제 당국인 식약처는 신중 모드다. 신약개발 중심 국가인 미국에서도 이번 FDA의 조치가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기존 법률과 이해상충의 문제가 없는지 제도 시행과정에서 혼선은 없는지 등도 같이 검토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려면 최소 6개월간 연구용역과 업계 의견을 듣는 공청회 등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우리 환경에서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기존 법률과의 충돌 문제가 없는지 신중하게 검토한 뒤 추진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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