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재명 대통령과 점심을 먹는 '오찬 회동' 주인공들 면면이 화제다. 여야, 진보와 보수, 재계와 시민사회 인사 등 가리지 않고 만나 한 끼 식사를 나누는 대통령 모습이 근래 정치권에서 보기 힘들었던 신선한 장면으로 다가온다. 이는 소탈한 이미지의 이 대통령이 취임 전부터 강조해 온 소통과 통합이라는 소신이 반영된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식사만으로 그칠 게 아니라, 식사 만남의 결과가 정책에 반영되는 등 실질적인 변화와 성과로 이어져야 하는 만큼 향후 이 대통령이 또 언제, 누구와 얼마나 마주 앉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이달 17일 이 대통령은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점심 식사를 가졌다. 김 전 위원장은 이재명 정부의 대미특사단장으로 내정됐지만 여권 일부의 반발로 갑작스레 제외됐다. 이에 이 대통령이 ‘위로의 자리’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김 전 위원장은 이 대통령에게 “지금까지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를 무난하게 잘 수행하고 있다”며 취임 이후 행보를 긍정 평가하면서 “대한민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 그리고 저출생이므로 이 문제에 대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중소제조업 경쟁력 활성화 정책에 대해서도 촉구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경륜이 있고 경험이 많으니 계속해서 도와달라”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주 연락하겠다”더니…18일 만에 또 야당과 점심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4일 대통령 취임 첫날부터 야당 대표를 포함한 각 정당 대표들과 오찬 회동을 갖는 등 '식사 정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취임 선서를 위해 국회를 찾았던 이 대통령은 우원식 국회의장과 여야 정당 대표가 모인 오찬장에서 “(개혁신당) 천하람 대표도, (국민의힘) 김용태 대표도 제가 잘 모시도록 하겠다”며 “적대와 전쟁과 같은 정치가 아니고, 서로 대화하고 인정하고 실질적으로 경쟁을 하는 정치가 되기를 바란다”고 이날 만남의 의미를 강조했다. 메뉴는 대통합을 상징하는 비빔밥으로 준비됐다.
특히 이 대통령은 야당 대표들을 향해 “자주 연락 드릴 테니 시간 내달라”고 재차 당부하기도 했다. 실제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직후인 지난달 22일 야당 지도부를 관저로 초청해 오찬 회동을 한 번 더 가졌다. 취임 18일 만의 일로, 전임 대통령들과 비교하면 매우 이른 행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두 달여 만에 야당 지도부와 회동했고 윤석열 전 대통령은 2년 가까이 지나서야 이재명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만남을 가졌었다.
이어 이달 3일에는 조국혁신당, 진보당, 개혁신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국회 비교섭단체 5당 지도부와 점심 식사를 함께 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는 기업 회생 절차에 들어간 홈플러스 소속 노동자 10만명의 고용 불안 문제와 다수 실형을 살고 있는 화물연대 소속 노동자들의 사면 복권 문제 등 진보 의제가 주로 논의됐다.
글로벌 통상 위기 극복이 시급한 만큼 이 대통령은 경제계와는 ‘도시락 오찬’을 통해 경제에 힘쓰고 일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줬다. 취임 9일 만인 지난달 13일 이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5대 그룹 총수와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윤진식 한국무역협회 회장 등 경제 6단체장과 만나 경제 현안을 논의했다. 이날 오전 10시에 시작한 간담회는 진행 도중 점심시간이 돼 참석자들은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보수 논객 조갑제·정규재 대표 초청해 “지혜 보태달라”
취임 한 달께인 이달 9일에는 종교계 지도자들을 대통령실로 초청해 점심을 함께 했다. 이 대통령은 국정 운영과 국민 통합, 사회 갈등 해소 방안에 대한 조언을 구하고 교육·인권·평화 등 폭넓은 사회 현안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나눴다. 앞서 7일에는 바티칸 성직자부 장관인 유흥식 추기경을 만나 새로 취임한 레오 14세 교황의 남북교류와 관계 개선에 대한 협력 의지를 공유하기도 했다.
진보와 보수 시민사회 원로들과 오찬도 이어 지고 있다. 먼저 이달 10일에는 진보 인사로 꼽히는 함세웅 신부, 백낙청 교수를 초대해 식사를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대통령이 스스로 강조한 국민통합을 위해 보수와의 대화에 나서줄 것”을 요청받았다.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바로 다음 날인 11일에는 보수 논객인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정규재 정규재TV 대표와 오찬 회동을 열어 관심을 끌었다. 이 대통령은 “모두의 대통령이 되기 위해 국민 통합에 앞장서겠다, 지혜를 보태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정규재 대표는 “투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달라”며 증여 및 상속에서의 세금 혜택을 제안했고, 조갑제 대표는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한자 교육을 강화하자, 군대의 '대'를 '대학'으로 만들어 교육 받는 군대로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사흘 뒤 인 14일에는 예비 공무원 300여 명과도 함께 점심을 먹으며 평소 국가 업무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충북 진천군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을 찾아 5급 신임관리자과정 교육생들을 위해 '국민주권시대, 공직자의 길'이란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예비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현직 대통령의 특강은 2005년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20년 만이다. 특히 행사가 끝나고 참석자들과 함께 한 이날 오찬 자리에서 이 대통령이 국그릇을 통째 들고 마시는 일명 '드링킹 샷'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전임 대통령들의 ‘식사 정치’는?…“소통 결과에 주목해야”
대통령의 '식사 정치' 자체가 낯선 풍경은 아니다. 평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가 ‘밥’이라는 원초적 소재를 통해 국민들에게 한 층 부드럽게 느껴지고 식사 상대방과도 한층 격의없는 대화를 나눌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대 대통령들도 사안이 있을 때마다 각계 각층 인사들과 만나 한 끼 식사를 통해 조언을 구하곤 했다. 대통령이 누구와 만나서 밥을 같이 먹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늘 '뉴스'가 돼 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9명과 청와대에서 오찬을 가졌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언론사 보도·편집국장을 초청해 오찬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반면 윤석열 전 대통령은 당정 갈등 문제를 풀기 위해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과 오찬을 추진했지만 거절당한 바 있다.
다만 문 전 대통령은 임기 초반 소통 의지와는 달리 시간이 흐를 수록 제한적인 기자회견, 민감한 현안에서는 야당과 토론 부족 등 지적에 직면했다. 당시 문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만이 소통은 아니다"라며 '불통' 이미지를 직접 반박하기도 했다. 윤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최초로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을 도입하는 파격을 보였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 외부 일정 등 중단되는 일이 잦았고 결국 6개월만에 전면 중단되기도 했다. 기자회견 대신 외신이나 보수 언론과의 단독 인터뷰를 선택하면서 소통은 커녕 '불통'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이는 결국 ‘비상 계엄’이라는 정권 몰락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과거엔 대통령이 반대 진영 인사와의 식사 정치가 드물었지만, 이 대통령은 그 틀을 복원했다는 평이 나오고 있다. 아직 임기 초반이기는 하지만 이 대통령이 ‘반대파’와의 식사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기류가 포착된다는 지적이 많다. 여야, 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인사를 폭넓게 만나 민생·통합 메시지를 강조함과 동시에 국민에게는 소탈하고 인간적인 리더 이미지도 심을 수 있다. 최근 이 대통령의 국정수행 긍정 평가는 취임 이후 5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가며 64.6%(리얼미터, 14일 발표)를 기록했다.
경제 양극화, 저출생 대책, 노동계 현안, 사면 복권 등 민감한 이슈까지 식사 정치에서 집중 논의된 것으로 전해졌다. 주요 인사들이 정책 제언을 하면 이 대통령이 경청하는 모습으로 화답하는 식이다. 다만 이 대통령의 광폭 식사행보가 친목과 보여주기식 형식에만 그쳐서는 안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겉으로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책 변화로 얼마나 이어지는 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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