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아래 구름이 흘렀다. 천주봉 정상에 서니 대별산맥의 능선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바위는 하늘을 찌르듯 솟아 있었고 그 틈새마다 흰 운무가 부드럽게 감싸올랐다. 바람은 맑고 서늘했으며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이 공간을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바위에 새겨진 여섯 글자 ‘등천주 득천조(登天柱 得天助, 천주산에 오르면 하늘의 도움을 얻는다).’ 중국어로 읽으면 앞뒤 단어의 발음이 같다는 설명에 피식 웃음이 났다. 여정의 시작은 이 자리가 아니었지만 이 순간을 위해 길은 존재했다.
인천에서 3시간, 가까운 거리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중국 허페이 신교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도시는 아침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며 창밖을 바라보니 고층 빌딩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넓게 펼쳐진 논밭과 낮은 마을 지붕, 그리고 산줄기였다. 멀리 실루엣처럼 드리운 그것이 바로 중국의 ‘허리’라 불리는 대별산맥. 이 산맥은 화강암으로 이뤄진 기암괴석들로 잘 알려져 있다. 중국 현지에서는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과 견줄 정도의 장관이라 여겨진다. 안후이성, 허난성, 후베이성에 걸쳐 있는 대별산맥의 총면적은 약 6만 ㎢. 이는 대한민국 총면적 10만 340㎢의 3분의 2 수준이다. 중국의 거대한 스케일을 느낄 수 있었다.
대별산맥은 국내 여행사 ‘여행을 만들다’를 통해 현지 경험과 안전한 일정이 보장되는 방법으로 떠날 수 있다.
케이블카에 올라 운무의 세상으로
목적지는 대별산맥을 대표하는 봉우리, 천주산. 현지에서는 ‘환공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굳센 남성성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천주산과 함께 대별산맥을 대표하는 명당산은 ‘환모산’으로 여성을 의미한다.
올해 3월 천주산 동쪽에 새로 개통된 동관 케이블카는 약 3300m 길이로 10분 남짓 만에 산의 중턱까지 편하게 오를 수 있다. 탑승하는 순간부터 창밖으로 펼쳐지는 짙은 숲과 우뚝 선 암벽, 간간이 터져 나오는 폭포의 울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상부역에 도착하자 이제부터는 오롯이 두 다리의 몫이었다.
시의 악마 백거이의 숨결
돌계단에 기대어 올라가던 중 바위에 새겨진 시구가 눈에 들어왔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작품이다. ‘천주일봉경일월, 동문천인쇄운뢰(天柱一峰擎日月, 洞门千仞锁云雷).’ ‘천주봉은 해와 달을 떠받치고 동굴 입구는 천 길 구름과 번개를 가두듯하리라’. 백거이는 이백·두보와 함께 중국 삼대 시인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시마(詩魔)’라는 별칭이 있을 만큼 시에 몰두했다. 그의 시구가 산을 오를수록 마음을 붙잡았고 천년 전 그도 비슷한 숨결을 마주했을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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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 만든 연단호의 고요
정상으로 향하던 길목에 ‘연단호’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해발 약 1100m 고지에 위치한 이 호수는 면적 약 3만 ㎡, 수량 약 8만 ㎥ 규모다. 이름에 연연한 신비로움은 이곳저곳에 깃들어 있지만 무엇보다 호수 가장자리의 잔잔한 물결이 눈길을 끌었다.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 스치는 바람에 은은하게 흔들리는 물결, 산과 하늘이 함께 일렁이는 풍경이었다.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물빛 속에 머무는 순간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천주봉, 절벽과 하늘 사이
다시 길을 재촉하자 절벽 위 나무 데크가 나타났다. 발 아래 수백 m의 낭떠러지가 펼쳐졌고 그 끝엔 하얀 구름이 가득했다. 마침내 길이 끝나는 지점, 천주봉 정상이 드러났다. 사방으로 풍경이 열렸다. 동쪽으로는 날카로운 산등성이가, 서쪽으로는 부드러운 능선이 이어졌고 사이사이 점처럼 박힌 마을과 논, 하얀 물줄기가 어지럽지 않게 어우러져 있었다.
정상 바위에 새겨진 ‘등천주 득천조’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행운의 주문처럼 여겨지는 이 문구는 ‘천주’와 ‘천조’의 발음이 비슷해 자연스럽게 유희처럼 들렸다. 하지만 1400m 이상을 올라온 지금 마주하니 웃음보다 묵직한 울림이 먼저 찾아왔다. 발밑 구름과 바람, 그리고 여정이 증명하듯 산이 주는 도움은 하늘의 도움과 다를 바 없었다.
천주산에서 하늘을 얻다
하산길에 다시 마주한 연단호의 빛은 아침보다 더욱 깊어졌다. 호수 위에 떠 있는 구름 한 조각이 내려앉은 듯한 풍경에 오늘의 여정이 오래 기억될 것 같았다.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창밖 구름을 바라보며 천주산의 바람과 정상의 순간이 다시 한 번 선명하게 떠올랐다. 모든 길의 끝이자 시작이던 천주봉에서 느낀 감정은 단순한 장관이 아니었다. 힘겨운 등반 끝에 다리에 힘이 풀렸던 순간에도 마음은 유난히 가벼웠다. ‘하늘의 도움’이라는 말은 단순한 문구가 아니다. 발 아래 구름과 바람, 그리고 천주산이 준 살아 있는 힘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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