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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헌신 대가는 중고 노트북…스트레스로 정신과 치료도 받아"[벼랑 끝 벤처 생태계]

< 1 > 폭증하는 벤처 난민-비자발적 퇴사자 심층 인터뷰

퇴직자, 구조조정 트라우마 심각

실의에 빠져 반년간 재취업 포기

퇴직금 지연에 GPU 담보 잡기도

"향후 취업 과정 불이익 당할라"

회사상대 체임 법적조치도 주저





수십~수백 억 원의 투자를 받은 유망 스타트업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경영난에 빠진 스타트업 대표는 직원들의 퇴사 이후 삶을 외면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퇴직자들은 생활고 속에서도 ‘실패자’라는 사회적 낙인을 지우고 재기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다만 이들은 대표가 임금을 체불하고 퇴직금을 고의로 주지 않아도 법적 소송에 선뜻 나서기를 주저했다. 사회생활의 첫발을 떼게 해주고 한동안 같은 꿈을 키워갔던 애증 섞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서울경제신문은 비자발적으로 회사를 떠난 퇴직자 20여 명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사연을 자세히 들어봤다.

중고 노트북, GPU 탈취…퇴직금 지연에 판치는 꼼수


“다니던 회사가 추가 투자 유치에 실패했고 갑작스럽게 권고사직 통보를 받았습니다. 위로금 대신 제가 받은 것은 사무실에 방치돼 있던 중고 가전이었습니다.”

TV 광고로 한때 유명세를 탔던 에듀테크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던 최 모 씨는 2년 전 구조조정 대상이 됐던 당시를 떠올리며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회사가 최 씨에게 헌신의 대가로 제공한 것은 위로금이 아닌 중고 노트북이었다. 최 씨는 폭풍처럼 몰아쳤던 구조조정에 대한 트라우마로 6개월 동안 재취업도 포기하고 실의에 빠졌다. 그는 “재취업을 알아보고 있지만 그 당시 충격이 너무 커 백수가 될지언정 스타트업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며 몸서리쳤다.

임직원 약 50명 규모의 메타버스 스타트업에서 일했던 한 개발자는 대표가 퇴직금 지급을 기약 없이 미루자 평소 사무실에서 쓰던 그래픽처리장치(GPU) 칩을 담보로 잡았다. 이 회사에서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일했던 박 모 씨는 “고가의 회사 자산을 퇴직자가 맘대로 소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회사 측에서 숱하게 급여 지급에 대한 약속을 어긴 것도 사실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청춘을 바친 회사와의 이별은 떠나는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스타트업 퇴직자는 임금 체불과 퇴직금을 받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례가 많았다.

스타트업 두 곳에서 재직한 경험이 있는 1991년생 이 모 씨는 퇴사하는 과정에서 밀린 월급과 퇴직금을 모두 받지 못했다. 첫 직장인 유통 계열 회사에서는 6개월 재직 후 권고사직을 받았다. 두 번째 회사는 핀테크 스타트업이었지만 첫 달부터 월급이 지급되지 않았다.

이 씨는 “대표가 투자 받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월급이 3개월 동안 나오지 않아 회사를 나오게 됐다”며 “근무 기간이 길지 않아 실업급여가 한 달에 약 150만 원 나오는데 5개월 뒤에는 이마저도 끊겨 막막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한때 유력한 유니콘 후보로 여겨졌던 배달 대행 스타트업에서 퇴직한 김 모 씨는 퇴사 당시를 회상하며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회사는 경영 어려움 등을 이유로 같은 팀 소속 직원 10명 중 김 씨를 제외한 대부분을 권고사직하겠다고 통보했다. 결혼과 출산 준비를 앞둔 동료들이 눈에 밟혔던 김 씨는 동료들의 고용을 보장해달라는 당부와 함께 먼저 손들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든 회사를 나왔다.



재취업 불이익 우려에…임금 체불 소송 포기


밀린 임금과 퇴직금을 받기 위한 지난한 과정은 스타트업 퇴직자에게 또 다른 고통이다. 대표가 ‘모르쇠’ 식으로 대응할 경우 형사 고소와 고용노동부 진정 등을 통해 대지급금을 받을 수 있지만 이 과정은 절차가 복잡하고 심적 부담이 커 주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30대 여성 지 모 씨는 지난해 9월 퇴사하며 회사로부터 나중에 퇴직금을 지급하겠다는 구두 약속을 받았지만 대표는 이후 돌변했다. 지 씨는 “퇴직금을 요구하니 대표가 강남경찰서에 신고하라며 되레 적반하장으로 나왔다”며 “형사 면담도 해야 하고 고용지청도 찾아가야 하지만 나중에 취업할 때 불이익이 생길 수도 있고 여러모로 압박감이 들어 대부분 퇴사한 동료들이 고소를 안 한 것으로 안다”고 속사정을 밝혔다.

대신 이들이 택한 선택지는 회사에서 제시한 ‘임금 지급 지연 합의서’에 울며 겨자 먹기로 서명하는 것이었다. 법적 효력이 없는 계약서지만 마지막까지 회사의 선처를 기대하는 것 말고는 뚜렷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때 임직원이 100명에 달했던 신생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주도했다는 한 인사는 “회사의 경영 사항이 현재와 대비해 현저히 나아지지 않을 경우 체불 급여는 급여 발생월로부터 최대 6개월 이내에 소급 지급하는 방식으로 직원들과 합의를 했다”면서 “미지급 임금에 대해서는 연 20% 가산 이자를 합산 지급하기로 계약서에는 적혀 있지만 현실적으로 지킬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설립 초기부터 동고동락하며 회사를 키워 온 ‘동지애’ 역시 법적 조치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소다.

한 배달 대행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다 권고사직을 당한 변 모 씨도 3개월치 월급과 퇴직금을 받지 못했다. 그는 퇴사한 동료들을 모아 회사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재직 중인 회사 동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변 씨는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회사를 살리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게 걸린다”면서 “이 회사가 첫 회사고 아프지만 감사한 손가락이고, 직원들도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며 복잡 미묘한 감정을 드러냈다.

핀테크 회사에 1년 1개월 정규직 개발 직군으로 일하다 퇴직금을 받지 못하고 나온 30대 남성 오 모 씨도 동료의 집단소송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퇴직금을 못 받았지만 그래도 내 능력을 알아봐주고 나를 처음으로 뽑아 준 회사인데 법적 소송까지 하는 것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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