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숙련공에 대한 비자 제도 개선을 시사한 것은 해외 숙련공을 데려다 자국민을 교육시키는 것이 제조업 부활의 가장 빠른 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미 투자를 압박하면서도 비자 발급을 제한하는 것은 모순된다는 지적을 받아들인 결과로 풀이된다. 우리 정부도 미국의 이러한 필요성에 맞춰 근본적인 비자 제도 개선을 요청할 방침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현지 시간) 워싱턴DC 인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금 이 나라에 배터리를 아는 인력이 없다면 우리가 그들을 도와 (미국에) 인력을 불러들여야 한다”며 “미국인 근로자가 배터리·컴퓨터·조선 분야에서 복잡한 작업을 하도록 훈련 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또 “우리에게는 더 이상 없는 산업이 많다”고 자국의 약점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인력을 양성하는 방법은 능숙한 사람을 불러 일정 기간 머물게 하고 도움을 받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발언에 대해 조현 외교부 장관은 8일 “매우 긍정적인 방향의 코멘트”라며 “앞으로 한미 간 윈윈할 수 있는 협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장관은 이날 미국 워싱턴DC로 출국하기 직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긴급 질의에 참석해 “미국은 대규모 투자 요청을 해온 상태이고 우리로서는 비자 문제 선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번 단속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미 측에 분명히 항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리 근로자 300여 명은 4일(현지 시간) 미국 조지아주 서배나의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서 미 정부가 실시한 불법 체류자 단속으로 구금된 상태다. 정상적인 절차대로면 조사나 재판을 거쳐야 하지만 한미 당국 간의 교섭에 따라 이들은 이르면 10일 LG에너지솔루션이 마련한 전세기를 타고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이들 다수는 공장 건설 등에 참여할 수 없는 전자여행허가시스템(ESTA) 또는 B1(단기 상용) 비자로 체류 중이며 본인 동의 및 비용 부담하에 출국하는 자진 출국의 방식을 택했다. 이들이 향후 미국 재입국 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에 대해 조 장관은 “(불이익이 없는 방향으로) 미 측과 대강의 합의가 이뤄졌다"고 답했다. 현재 한국인이 미국 내 공장 등에서 근로하기 위해 필요한 비자는 발급 받기가 극히 어려운 상황이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문직 취업(H-1B) 비자, 주재원 비자인 L-1과 E-1을 발급받은 한국인 비율은 각각 1.0%, 4.2%, 2.2%에 그쳤다. 특히 한국인 H-1B 비자 발급은 지난해 월평균 204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올해 1~5월 131건으로 약 37% 급감했다.
이와 관련해 우리 정부도 로비스트를 고용하고 현지 의원들을 통해 관련 법안을 미 의회에 발의하는 등 제도 개선을 추진해오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 기업의 ‘숙원 사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최대 1만 5000개의 한국인 전문 인력 대상 별도 비자(E-4) 신설에 관한 법안이 발의됐으나 2012년부터 사실상 진척이 없다.
최근 들어서는 미국의 반(反)이민 정서와 이에 따른 미 정부의 정책 기조 변화로 더욱 어려워졌다. 캐나다(무제한), 멕시코(무제한), 싱가포르(5400명), 칠레(1400명)처럼 국가별로 연간 쿼터를 확보한 사례가 있지만 모두 1990~2000년대 초반 사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국 내 반이민 정서가 강하지 않았고 FTA에 전문직 비자 발급 쿼터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후 미국 의회의 문제 제기로 FTA 협상에 비자 문제를 포함시키는 방식은 폐지됐다. 이에 따라 호주는 2005년 미국과의 FTA를 체결할 당시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직접 의회를 설득, 입법을 거쳐 1만 500명 규모의 전문 인력 비자 쿼터를 받은 유일한 사례가 됐다.
물론 지금도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내리거나 의회를 설득해 E-4 쿼터에 관한 입법을 추진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다만 미국 내 주요 기업 노조부터 공화당 의원들까지 ‘미국인 일자리 빼앗기’에 부정적인 만큼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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