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문을 여는 순간 고소한 고기 냄새가 피어오른다.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인데 배우와 악사들이 이미 판을 벌이고 앉아 잔을 부딪치며 고기를 굽고 노래를 부른다. 이곳은 일본 오사카 공항 근처 판자촌에 위치한 허름한 곱창집 ‘야끼니꾸드래곤’. 일본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흥겨운 춤과 노래를 즐기다 보면 어느새 관객조차 이 곱창집 한 켠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손님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자이니치)의 삶과 애환을 담은 이야기로 오랜 기간 사랑받은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 : 용길이네 곱창집’이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 14년 만에 돌아왔다. 예술의전당과 일본 신국립극장이 2008년 공동 제작한 연극은 2011년 한 차례 한국에서 재연된 바 있으며 올해 한일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세 번째 무대를 올렸다. 올해 일본에서 오사카 엑스포가 열렸는데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오사카 만국박람회가 처음 열렸던 1970년이라는 점도 이 연극의 귀환에 의미를 더한다.
연극은 자이니치에 대한 편견이 짙었던 1970년대 비행기 소음 탓에 일본인 중산층은 기피한 이타미 공항 인근 한인 정착촌의 일상을 그린다. 이야기의 중심 축은 태평양전쟁에서 한쪽 팔과 아내를 잃은 뒤 제주 4·3 사건으로 고향의 가족마저 모두 잃은 채 일본에 정착해 사는 용길(이영석)이다. 용길은 현재의 아내 영순(고수희)을 만나 전처의 자식인 시즈카(지순)와 리카(무라카와 에리), 영순이 데려온 미카(정수연), 영순과 낳은 막내 토키오(키타노 히데키) 4남매를 키우며 자신 이름의 ‘용(龍)’을 딴 곱창집 ‘드래곤’을 운영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계절의 흐름에 따라 진행되는 연극은 주로 왁자지껄한 웃음과 함께 전개되지만 마냥 웃고 넘길 수는 없는 애환이 가득하다. 재일조선인과 가난한 노동자를 상징하는 장소이자 휴식처인 이곳에서 변변한 일이 일어날 리 없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로 일본인들이 꺼리는 허드렛일만 도맡아야 하는 울분, 친구들의 괴롭힘에도 꾹 참고 견디는 것 말고는 해법이 없는 답답함, 돈을 주고 집을 샀는데도 터전을 잃고 쫓겨나야 하는 괴로움.
그럼에도 이들은 가족이 있기에 다시 웃어낸다. 좋은 이야기에는 여러 겹이 있어 시대마다 다르게 읽힌다고 했던가. 초연 당시 재일조선인의 비극을 말했던 작품이지만 2025년 오늘날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아끼는 가족의 풍경이다. 이들은 “한 손에는 돈, 한 손에는 눈물”이라는 이방인의 삶 속에서도 가족과 함께 찬란한 벚꽃비를 바라보는 순간 “내일은 꼭 좋은 날”이라고 결심한다.
연극은 일본 최고의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자리매김한 정의신 연출의 대표작으로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자이니치 2.5세로 살아온 그의 삶과 정체성이 섬세하게 녹아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14일부터 시작한 공연은 23일까지 9일간 진행된다. 정 연출은 "이번이 마지막 공연이 될 수도 있는 만큼 많은 관객이 함께 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kmkim@sedail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