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중소기업과 벤처·스타트업들이 고금리·고물가·고환율 등 ‘삼중고’ 속에서 스케일업(규모 확대)에 실패하며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자체 경쟁력을 키우지 못한 채 외부 자금에만 의존하거나 내수 중심의 사업 전략에 머무른 스타트업들이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서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정부가 ‘선택과 집중’ 전략을 통해 각 분야 글로벌 1등 기업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기업가치 수천억 원을 달성한 성숙기에 접어든 스타트업들이 데스밸리(성장 정체 구간)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유로는 △대규모 자금 투입을 통한 무리한 사업 확장 △벤처캐피털(VC)들의 소극적인 투자 기조 △정부의 비효율적인 스타트업 지원 정책을 들 수 있다.
특히 스케일업 단계에서 공격적인 자금 집행을 진행하다 후속 투자 유치가 불발되면서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가 가장 많다. 자금 조달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하게 사업 영역을 넓히거나 비용 구조를 키운 기업들이 현금 흐름이 막히는 순간 곧바로 경영 위기에 직면하는 것이다. 또 스타트업들의 자금줄 역할을 하는 VC들이 성숙기에 접어든 스타트업들의 기업가치에 부담을 느끼고 투자를 소극적으로 진행하는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투자 업계 관계자는 “산업구조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기존 높은 기업가치 내세우는 스타트업에 투자하기보다는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인공지능(AI) 등 새로운 분야의 초기 스타트업에 투자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에 유니콘(기업가치 1조 원 이상이 비상장사)으로 도약을 앞두고 있는 스타트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명품 플랫폼 경쟁에서 밀린 ‘발란’, 무리한 사업 확장을 추진한 육류 e커머스 스타트업 ‘정육각’, 글로벌 OTT 등과의 경쟁에서 밀린 ‘왓챠’ 등이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빠지며 기업회생 절차에 돌입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회생업계 관계자는 “초기 성장기에는 정부 지원과 시장 확대에 힘입어 기업들이 빠르게 몸집을 키우지만 성장세가 꺾이면 비용 증가와 수요 변동을 감당할 체력이 약한 기업부터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산업 육성 방향의 변화도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201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 초반까지는 핀테크·블록체인·메타버스 등 신사업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추면서 관련 분야 전용펀드가 쏟아졌지만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렵다. 정부의 산업 육성 기조가 AI와 바이오 등으로 이동하면서 정책자금을 기반으로 투자하는 VC들의 관심사 역시 자연스럽게 바뀐 결과다. 이와 함께 해당 분야를 지원하던 각종 정부 사업이 축소된 점도 시장 위축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무분별한 ‘뿌려주기 식’ 스타트업 지원 정책도 오히려 독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과거 제조업이나 오프라인 커머스가 성장하던 시기에는 지역 기반의 강소 기업들이 다수 등장할 수 있었지만 온라인 중심의 시장 확산과 첨단기술 경쟁이 심화되면서 이제는 1등 기업만이 살아남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내수 시장에만 의존하고 사업 성장 속도가 더딘 스타트업들은 일정 규모 이상의 스케일업을 달성하지 못한 채 시장에서 사라지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벤처 업계에서는 유망 스타트업에 대한 집중적인 지원이 일자리 창출 측면에서도 더 효과적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내수 중심의 여러 기업을 두루 키우기보다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소수의 강력한 기업이 탄생할 경우 산업 전반의 성장 속도가 빨라지고 고용 유발 효과은 물론 국가 경쟁력 강화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네이버(NAVER) 같은 기업이 대표적인 사례다. 네이버는 국내 1등 포털로 성장한 후 핀테크·e커머스·콘텐츠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또 네이버를 중심으로 수많은 협력사·스타트업·프리랜서 생태계가 형성되면서 수천 개의 직간접 일자리가 창출된 점도 집중 육성 전략의 긍정적 효과로 꼽힌다.
한국벤처캐피탈협회 회장을 지낸 윤건수 DSC인베스트먼트 대표는 “스타트업들이 스케일업 단계에서 데스밸리를 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은 아니다”라며 “이에 정부에서는 산업 전체 흐름을 잘 판단해야 하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일부 기업에 대해서는 집중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지원해줌으로써 글로벌 1등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줘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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