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포드의 레이싱카 페라리를 깬다

연기를 휘날리며 회전하는 타이어나 엄청난 성능의 엔진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차고 안쪽으로 한 걸음을 옮겨 그 곳에 모인 자동차 설계 분야의 천재들을 보자 손색없는 경주용 자동차의 탄생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이들은 양산용 레이싱 카의 속도 증가라는 명목 하에 모인 최고 전문가 팀.

그러나 포드 역사 상 최고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 드림팀도 유리창을 여닫는 사소한 부분에서 이견을 보이고 있었다. 디자이너 카밀로 파르도(Camillo Pardo)는 자신이 설계한 매끈한 표면이 희생된다는데 반감을 나타냈지만, 엄청난 돈을 지불할 고객들의 입장에서 운전석에 갇힌 듯 밀폐된 느낌을 좋아할 리 없다는 것을 감안해야 했다. 파르도는 또한 측면 유리창 아래 쪽 출입문 표면에 경주용 자동차답게 깊이 패인 홈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동력 계통 엔지니어인 커트 힐(Curt Hill)은 이 홈을 이용해서 운전석 바로 앞에 위치한 500마력 짜리 수퍼차지 V8 엔진에 공기를 주입하자는 의견을 냈다. 반면에 안전 전문가 리처드 제리언(Richard Jaryan)은 각 출입문 내부에는 보강 빔을 넣어서 측면 충돌 시에 승객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디자인과 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프레드 굿나우(Fred Goodnow)는 이러한 난제들에 부딪히자 조용히 연구를 한 다음 스스로 ‘창조적인 타협’이라고 부르는 제안을 하나 내놓았다. 타협안은 이랬다. 유리창을 고정된 부분과 움직일 수 있는 부분으로 나누고, 창문 아래쪽 모서리를 약간 이동시켜서 유리에 복합적인 곡선을 부여한다. 이로 인해 출입문 홈을 약간 비틀어 가이드 채널을 경사지게 할 수 있어 유리가 나선 경로를 따라 이동하도록 함으로써 측면 충돌 보호 빔을 넣을 공간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환기와 안락함을 위해 창문을 방해하던 부품들을 이리 저리 조정하겠다는 것이다. 엔지니어들은 CAD/CAM 시스템에 저장된 디지털 자동차 모델을 통해 이 아이디어를 구현해냈다. 파르도는 디자인을 약간 변경한다는데 동의했으며 성능 개발 엔지니어인 켄트 해리슨(Kent Harrison)은 다음 풍동 실험에서 공기 흐름을 다시 확인할 예정이다. 다른 중요한 사안들도 이 모델을 통해 결정되었고 이 팀을 기다리고 있는 다음 난제로 관심이 옮겨졌다.

이 팀은 포드 회장인 윌리엄 크레이 빌 포드 주니어의 지시로 루즈강 근처 한 정체 불명의 건물에서 결성됐다. 루즈강은 헨리 포드가 모델 T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후 사들인 ‘페어 레인’부지 근처를 흐르는 강. 빌 포드가 이 팀에게 부여한 과제는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성공시켰던 레이싱카 GT40의 21세기 버전을 단 16개월만에 완성해 내라는 것. 이렇다 보니 이 엔지니어들에게는 ‘심사 숙고’란 단어가 한낱 사치에 불과하다.

포드사 내부에서 ‘GT 스컹크’라고 알려진 이 프로젝트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무려 143일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적인 기간에 P-80 슈팅 스타 프로토타입을 완성해낸 록히드사의 엔지니어들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최단시간 기록 갱신이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제조 회사의 무모한 도전의식을 일깨워 회사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시도이기도 하다. 1901년, 헨리 포드는 16km 자동차 경주에 자동차의 선구자인 알렉산더 윈튼을 요란스레 참가시킨 바 있다. 이 경기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결국 포드가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고, 결과적으로 초기 성장 단계였던 포드는 성공적인 투자유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62년이 지난 후, 창설자 헨리 포드의 손자인 헨리 포드 2세는 페라리 인수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국제 내구성레이스(endurance racing) 우승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거액을 내걸었다. 내구성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이 경주는 그동안 포드로서는 우승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부문이었다. 이러한 도전의 결과로 눈물 방울처럼 생긴 모습에 차체가 매우 낮은 380 마력 짜리 수퍼카 오리지널 GT40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처음 2년 간 24시간 르망 레이스에 참가했을 때에는 두 번 다 실패를 겪었다. 이후 1966년에 연속으로 6번 우승한 페라리를 제치고 3 지점을 드디어 처음으로 통과했다. 이 차는 이후 세 번의 우승을 차지했으며 1970년까지 148개의 주요 우승컵을 휩쓸었다. 마지막 GT40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까지 이 차는 그야말로 경외의 대상이었다.

파이어스톤 타이어 사건과 익스플로러 SUV의 실패, 사임한 자크 나사르 전 CEO의 무리한 해외 확장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 등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쳐 포드는 2001년에만 50억 달러 상당의 손실을 입었다. 이에 따라 헨리 2세의 손자인 현 포드 회장은 과거 포드사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서 유사한 무언가를 시도할 필요를 느꼈다. 회생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서 빌 포드는 회사의 허리띠를 졸라매었고 자산을 매각하는 동시에 고위 임원진을 재구성했다. 여전히 그는 포드의 이미지를 쇄신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명의 임원 - 북미 자동차 개발 부서의 책임자인 크리스 데오도르, 설계 책임자인 J 메이스 - 이 2002년 1월에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북미 국제 모터쇼에서 새롭고 더 강력해진 파워의 GT40을 전시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최근 별다른 성공모델이 없던 포드에서 선더버드를 부활시켜 커다란 주목을 끌어던 것을 감안할 때, 또 다른 전설의 부활이란 해볼만한 것이었다.

GT40 컨셉카의 공개에 대중들은 매우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포드에서는 이 프로젝트를 거의 3년이나 조용히 진행시켜 왔다. 1999년 특수 차량 엔지니어링 책임자인 굿나우와 존 코레티는 현대적인 재료와 기술력을 이용해 1회 실험으로 GT40을 새로 개발한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이들은 실제로 차량 부품과 구성 요소들을 테스트하기 위해 초고속 연구 도구를 구축했다. “프로젝트를 조용하게 진행하기 위해 저는 ‘페추니아’와 같은 이상한 이름을 붙여 누구도 그 의미를 추론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GT 프로젝트의 기술 조언을 맡았던 네일 르셀러는 이렇게 회고했다. “그런데 그 이름이 그대로 채택되었죠.”

페추니아 프로젝트에서 얻은 괄목할만한 성과는 형성된 알루미늄 차체 패널에다 용접한 공간 프레임 막대를 사용해 자동차의 중량을 감소시키고 성능을 최대화한 것이다. 르셀러는 “15년 쯤 전부터 포드가 연비와 배기 법규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알루미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40여 대의 실험용 알루미늄 머큐리 세이블 모델을 만든 적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우리 연구 부서에서는 ‘수퍼플라스틱’주조 및 용접 기술을 습득했고 알루미늄 부식 기술에 익숙했기 때문에 GT40의 초기 단계에서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데오도르와 메이스는 2002년 모터쇼에서 전시될 GT40 제작에 착수 했을 때 행사까지 10개월이 남아 있었다. 페추니아 팀은 설계된 대로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힘들었지만 몇 개월 간 더 노력한 끝에 드디어 완성된 컨셉카가 디트로이트의 코보 홀에 전시되었다. 이것은 포드에게 있어 더할나위 없는 기회였다. 노란색과 검은색 줄무늬로 도장 처리된 이 스포츠카는 알루미늄 프레임과 5.4 리터 32 밸브의 500마력 V8 엔진을 달고 있었다. 전시회의 관심은 온통 이 컨셉카에 쏠렸다. Edmunds.com과 같은 자동차 전문 사이트에서는 이러한 멋진 수퍼카를 통해 비평가와 소비자 모두 포드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포드에는 수많은 격려 메일과 함께 수많은 주문 수표까지 날아들었다. 데오도르는 코레티에게 이 컨셉카를 포드의 창의성과 기술력을 보여 줄 수 있는 양산 모델로 제작하는데 드는 자원을 계산해보라고 지시했다. 굿나우는 양산 가능성과 관련해 상당한 분량의 연구 보고서를 제출했고 포드 회장은 단 한가지 조건을 걸고 이를 승낙했다. 창사 100주년 기념 퍼레이드가 열리는 2003년 6월 16일까지 직접 운전할 수 있는 양산형 차량을 완성하라는 조건이었다. 이들에게 보통 2년이 소요되는 작업을 16개월만에 완성하라는 임무가 부여 된 것이다.

굿나우는 회사의 형식에서 벗어나면서도 포드의 기술적인 자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포드 본사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스컹크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즈 리버 부근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이곳의 내부 시설은 무슨 투자 사무실이나 보험 사무소로 착각할 만큼 잘 꾸며 놓았지만 가장 빨리 진행되고 있는 포드의 새로운 역사가 그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 벽면에는 시속 322km 속도를 자랑하던 20세기 최고의 레이싱카의 제작 기술자들과 기계전문가들의 흑백 사진들과 그 가운데 현재 제작 중인 21세기의 시속 300km 양산형 자동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굿나우는 스컹크 프로젝트 팀을 구성할 때 한가지 철칙을 고수했다고 한다. “이것은 단지 훈련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처음으로 이루어보고자 하는 개척정신으로 무장된 우수한 인재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네일(르셀러)은 진짜 열정으로 가득한 사람들, 그러니까 자동차나 오토바이 경주에 참가한 적이 있는 사람이나 자동차에 빠져 있는 엔지니어들을 찾도록 도와 줬어요. 이 사람들은 뱃속까지 휘발유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죠.”

그 결과 각 부서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로 인정받던 30명의 엔지니어들이 선정되었다. “이 친구들 빼오려고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이 사람들 직속 상관들한테 이 2년 짜리 프로젝트에서 20년 걸려 얻을 수 있는 경험을 얻게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해야만 했어요.” 굿나우는 이렇게 말했다.



또 이 프로젝트에서는 설계와 엔지니어링이 여러 번 급하게 변경되기 때문에 중도 하차 없이 갈 만한 외부 용역 회사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였다. 포드에서는 공간 프레임과 차체 패널 구축을 위해 알루미늄 차체에 깊은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메이플라워’를 고용했다. 인테리어는 선더버드 부활에 공헌을 한 ‘리어’에게 맡겼다. 당시에도 급하게 변경이 되곤 했던 소규모 선더버드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회사였다. GT40 팀은 리어 사와 함께 일하면서 리어의 자회사인 유나이티드 테크놀러지스 오토모티브를 통해 전기 시스템까지 공급받는 등 뜻하지 않은 보너스까지 얻었다. 또한 오랫동안 포드와 함께 일해 온 ‘로쉬 인더스트리’가 동력 부문 개발 부서와 루즈 리버 사무소와 함께 작업했다. ‘리카드도’ 사에서는 트랜스 액슬을 공급했다. 굿나우는 “리카드도에서는 16주만에 아우디가 르망에서 우승할 때 사용한 트랜스 액슬을 개조해냈다”면서 “이 회사가 우리 프로젝트에 적격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라고 만족스러움을 표시했다.

이렇게 스컹크 프로젝트 팀은 이미 완성된 컨셉카를 이용해 골격이 갖춰진 상태에서 일을 빨리 진행시켜 갔다. 파르도는 차체 설계에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면서도 모던한 감각이 돋보이는 날렵한 표면에 혁신적인 외형이라는 것과 오리지널 모델의 충실한 업데이트라는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날카로운 각에 비율이 짧았던 파르도의 첫 작품에 대해 상사인 메이스는 ‘일반적으로 모던’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 첫 번째 작품은 뭉툭한 앞부분이 BMW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았다. 데오도르는 디자인이 원래의 클래식한 모습에서 벗어날 때마다 여타의 수퍼카들과 비슷해 보였다고 회상했다.

파르도는 새로 디자인하기 위해 자동차 수집가의 GT40을 빌려서 포드의 테스트 도로에서 운전해 보기도 했고 영감을 얻기 위해 그의 스튜디오에 주차시켜 놓기도 했다. 또한 벽에 1960년대의 물건들을 가득 채워놓기도 했으며 존 프랑켄하이머의 1966년 그랑프리 화면을 반복해서 보기도 했다. 그는 GT40의 영광스러운 시간들에 동화되면서 과거에 얻은 명성과 내구성에 대해 평가할 수 있었다. 드디어 파르도는 이 일이 단순히 GT40의 대체물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정신과 미래적인 디자인을 결합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리지널 모델과 너무 닮으면 안 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깨닫자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했다.

그 결과 언뜻 보기에 과거 오리지널 GT40과 혼동될 정도로 매우 유사한 차가 탄생했다. 자동차와 문이 모두 지붕의 일부로 연결되는 등 유사한 점들이 눈에 띈다. 그러나 곧 확연히 다른 특징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파르도는 뒤쪽에 설치된 동력부에 공기를 공급하기 위해 후방에 있던 홈과 환기구를 새로 고쳤다. 광폭 타이어에서부터 라디에이터 공기를 방출하기 위한 위쪽 표면의 넓은 구멍에 이르기까지 레이싱카로서의 기능은 보존되었지만 새로 적용한 표면은 보다 조화롭게 이어진다. 파르도는 이러한 모습을 ‘벨벳 장갑 속의 주먹’이라고 표현했다.

가장 눈에 띄는 오리지널 모델과의 차이점은 바로 크기. GT40의 이름은 그 높이에서 기인했다. ‘도로 표면에서 지붕까지’의 높이가 40.5 인치(1m 가량) 정도였던 것이다. 이렇게 낮은 높이는 공기 역학적으로는 훌륭했지만 르망에서 우승한 호리호리한 체격의 댄 거니가 타는데도 운전석의 높이를 조정해야만 했었다. 파르도는 운전자의 체격이나 안전에 대한 현재의 여러 사안들을 고려하면서 차체의 크기를 키워야 했다. 따라서 컨셉카에서는 원래 차체보다 높이가 3인치(7cm)가 더 커졌고 폭은 6.8인치(17cm), 차체 길이는 12.6인치(32cm), 휠 베이스는 11.4인치( 29㎝)씩 각각 늘어났다. 다시 말하자면 XXL 크기의 장갑에 마이크 타이슨의 주먹이 들어갔다고나 할까.

스컹크 프로젝트 팀이 결성된 후 10개월이 지나자 ‘르망’이라고 이름 붙인 방의 선반 위에 GT40에 들어갈 충격 흡수 장치, 스티어링 기어, 방열판, 배선 고정 부품, 배기 시스템 부품 등이 가득 들어찼다. 준비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이미 몇 년 전에 오리지널 자동차의 스페어 부품을 판매하던 ‘사피어 GT40 스페어사’에서 이 이름의 사용권리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 자동차를 ‘GT40’로 부르지 못하게 된 상황이었다.
이 회사 대표인 밥 우드는 너그럽게도 4천만 달러라는 가격에 이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포드사에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포드는 이를 거부했고 그래서 새 차에는 ‘GT’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제 한 쪽 벽에는 빌 포드가 퍼레이드에서 운전하는 ‘Job 1’의 데드라인까지 98일 남았다는 숫자가 쓰여졌다. 최종 양산 차량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홉 대의 실험용 차량이 이미 도로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프로젝트 팀은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GT에 적용했다. 그 결과 GT에는 주행 시스템이나 컵홀더, 글러브 박스 같은 것은 기대할 수도 없었고 차내에 골프 채 한 세트를 넣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 프로젝트는 무수한 임무들을 낟가리 쌓아 올리듯 한꺼번에 짜여진 스케줄대로 진행됐다. 긴 시간동안 일련의 순서대로 단계를 밟는 일반적인 절차 대신에 말이다. 이것은 자동차 설계에 있어 일반적인 방식들을 따르지 않았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개발 단계에서 이들은 한 대도 충돌시험을 거치지 않았는데, 이것은 포드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충돌시험으로 실제 차를 잃는 대신 GT 팀은 유한 요소 분석법(FEM)을 이용해 여러 가지 충돌 사고 상황을 컴퓨터를 통해 반복적으로 시뮬레이션함으로써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소프트웨어를 통해 엔지니어들은 연료 탱크를 차체 중앙 백본 튜브 내에 깊이 숨겨놓으면 최악의 사고에서도 안전하게 보호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시간 절약을 위해 항공 산업에서 사용되는 수퍼플라스틱 주형 공정을 적용하여 12개의 알루미늄 차체 패널을 제작, 사용했다. 일반적인 자동차 제작 과정에서는 보조 형성 다이를 통해 평판 금속 패널이 강철 다이에 맞게 압착된다. 그러나 수퍼플라스틱 형성 공정은 한 개의 다이만 필요하기 때문에 차체 패널 제작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절반으로 감소시킬 수가 있다. 알루미늄 판은 용융점 근처인 482℃까지 가열되고 이렇게 부드러워진 금속을 고압 공기가 금속을 다이 표면에 맞춰 형성한다. 이 공정은 포드 GT의 전방 곡면 펜더와 같은 패널 형성에 특히 안성맞춤이다.
또한 스테레오 리소그래피라는 정교한 기기도 시간을 단축시키는데 한 몫 했다. 이것은 엔진 부품의 실물 모형을 만드는데 필요한 시간을 줄여 주었다 (이 모형들은 실제 엔진 부품들이 완성되기 전에 설계 시 인접하는 부품들 간의 간격을 재는데 이용되는 것이다). 또한 알루미늄이나 강철 부품들의 주형을 만드는데도 이용되어 시간 단축에 기여했다.

이 팀은 스테레오 리소그래피 기기를 이용해 원하는 부품의 크기와 형태를 나타내는 세부적인 디지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기도 했다. 이러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얇은 폴리우레탄 수지 위로 자외선 레이저 빔을 발사해 부품의 형태를 만든다. 이 때 빔이 닿은 부분은 고체 상태로 변하고 닿지 않은 부분은 액체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스테레오 리소그래피를 이용해 GT 배기다기관의 디지털 이미지를 단 하루 만에 정밀한 플라스틱 부품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러한 부품을 생산하는 데 보통 몇 주가 걸리는 것을 감안할 때 정말 눈부신 성공이다. 스티어링 휠을 포함해 GT의 부품 약 20 퍼센트는 스테레오 리소그래피를 이용해서 제작되었다.
그러나 스컹크 프로젝트에서 거둔 가장 뛰어난 성과는 GT를 구동하는 수퍼차지 V8 엔진을 짧은 시간 안에 개발한 것. 기존 포드의 창고에서도 이런 엔진과 유사한 물건은 찾을 수가 없었고 더구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데 엔진 분야에서는 적어도 4년 이상의 세월이 소요된다.

그런데 이런 작업을 몇 달 안에 끝내야 했던 이 팀은 이를 위해 포드의 가장 큰 V8 엔진인 링컨 네비게이터의 5.4ℓ 300마력 엔진을 리엔지니어링하기로 결정했다. 로쉬 엔지니어들은 나스카 레이싱용 엔진을 다루면서 힘을 최대한 출력하도록 엔진을 쥐어 짜내는 일에 익숙해 있었다. 이 경험을 살려 이들은 네비게이터 엔진 블록과 헤드를 다시 설계하고 속도를 개선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그 중에서도 엔진을 가능한 낮게 장착하기 위한 건식 윤활 방식과 실린더에 충분한 공기와 연료를 공급해서 500 마력을 출력하도록 하는 트윈 캠 4 밸브 실린더 헤드, 내구성을 위해 주물로 제작한 강철 크랭크 축 등이 눈에 띈다. 또한 머스탱 코브라 개발 프로젝트에서 가져온 초대형 수퍼차저가 엔진 위에 설치되어 공기를 강제로 공급하도록 만들었으며 인터쿨러가 수퍼차저와 블록 사이에 위치해서 흡입 밀도를 극대화했다.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우리는 500 마력 출력이라는 목표치 이상을 달성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만든 엔진이 폭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굿나우는 이렇게 말했다.

스컹크 프로젝트에서 긴 근무 시간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GT 팀은 아침 6시 30분에 일을 시작해서 저녁 8시 30분까지, 점심을 위한 단 10분 간의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작업을 했다. 또한 디자이너들과 엔지니어들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이메일 대신 직접 면담을 통해 의사 소통을 했다. 마감 시간은 빈틈없이 지켜졌다. 굿나우는 “이 사람들을 처음 소집하고서 했던 말이 생활 패턴에 대혁신이 있을 거라는 것이었죠. 2년 동안의 신병 훈련소 같은 생활을 기대하라고 했습니다.”

신병 훈련소 생활은 이제 거의 끝나간다. 실험용 차량들은 이미 자신만만하게 테스트 스케줄이 잡혀 있고 ‘Job 1’도 거의 완성된 상태이다. 스컹크 팀은 번쩍거리는 스포츠카를 거리로 내보내기 전에 페라리 360의 명성을 조롱하는 듯 ‘포드 GT를 운전하는 게 훨씬 낫다(I’d rather be driving a Ford GT)’는 문구가 쓰인 범퍼 스티커를 붙였다. 강력한 수퍼차지 V8 엔진은 루즈 리버 근처의 알 수 없는 작업장에서 지금도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포드는 지금 도박을 하고 있다. 이 차를 공개했을 때 대중들이 단지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포드가 여전히 영광스럽고 혁신적이라는 각인을 심어줄 수 있는지 말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