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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여는 수요일] 아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5.06 18:05:50밥 대신 소금을 넘기고 싶을 때가 있다 밥 먹을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스스로에게 다그치며 굵은 소금 한 숟갈 입속에 털어 넣고 싶을 때가 있다 쓴맛 좀 봐야 한다고 내가 나를 손보지 않으면 누가 손보냐고 찌그러진 빈 그릇같이 시퍼렇게 녹슬어 있는 달을 올려다보며 내가 나를 질책하는 소리, 내 속으로 쩌렁쩌렁 울린다 이승이 가혹한가, 소금을 꾸역꾸역 넘길지라도 그러나 아비는 울면 안 된다해안에 사는 아비는 아비목 -
[시로여는 수요일]엄살 떠는 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4.30 05:00:00저 들에 햇살 찬연한 봄을 맞으시게 어여 맞으시게 아지랑이 몇 마리 잡아먹고 금방 배 아픈 시늉도 하면서 민들레 이런 것들에 걸려 넘어져 나 넘어졌네 무르팍이 다 깨졌네 피가 나네 엄살도 떨면서 아예 나 죽겠소 하고 벌러덩 누워버리시게 그러고 죽은 척하고 있으면 쑥 질경이 기적소리 종달새 상심 첫사랑 숭어 메기 담벼락 호랑나비 도마뱀 씀바귀 흑염소 돛단배 조개구름 이런 것들이 온몸에 나른히 퍼지기도 할 걸세 약 -
[시로여는 수요일] 人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4.22 17:53:52점심 때 지나 노부부가 곰탕집으로 들어선다 할아버지가 햇살 드는 창가 쪽 테이블로 가더니 의자를 빼주자 할머니가 당연하다는 듯 앉는다 김이 모락거리는 곰탕이 나오고 할아버지는 곰탕을 뜨면서도 연신 할머니를 바라본다 먼저 수저를 놓은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곰탕 뚝배기를 두 손으로 기울이자 이번에도 당연하다는 듯 할머니는 마지막 국물까지 퍼 드신다 할아버지가 평생 받아온 기울임을 이제는 되돌려 주는 모양이다 -
[시로여는 수요일] 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4.16 05:00:00하늘이 깔아 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쭉지에 파묻고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
[시로 여는 수요일] 매화나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4.09 05:00:00아버지는 마당에 있는 매화나무를 만져보라 하셨다 나무둥치는 밋밋하고 건조했다 아버지는 차고 맑은 매화꽃을 좋아하셨지만 꽃 피어 있는 날은 며칠 되지 않았다 매화나무도 대부분의 날을 꽃 없이 지냈다 특별할 게 없는 하루를 잘 사는 게 중요했다 평범한 일상을 반짝거리게 만드는 건 쉽지 않지만 밋밋한 하루하루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 촉촉한 날보다 건조한 날이 더 많지만 그런 날들도 소중하다는 것 그걸 알 -
[시로 여는 수요일] 마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4.01 18:06:32산과 들이 만나 말했습니다 사람들의 든든한 바탕이 되어 줍시다 그럽시다 평화로운 풍경도 되어 주고요산과 들이 아름다운 결심을 해 주었군요. 과연 그 둘이 만나는 곳마다 마을이 들어섭니다. 산은 집 지을 나무를 내어주고, 들은 일용할 식량을 길러줍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바탕이고 풍경이 되어 주었습니다. 두보는 나라가 망해도 산하는 그대로라고 말했습니다. 길재는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고 말했습니다. -
[시로 여는 수요일] 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3.26 05:00:00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
[시로 여는 수요일] 가난살이
사회 피플 2025.03.18 18:07:02과실나무는 해거리를 한다. 한 해는 많이 맺었다가 한 해는 적게 맺는다. 가난살이로 힘을 얻는다. 해거리가 어려우면 하루라도 가난살이를 하자. 한 끼니라도 걸러보자. 삽과 가방과 운전대를 이틀만이라도 내려놓자. 추위를 겪어야 꽃이 피는 엉겅퀴, 냉이, 꽃다지처럼 소나무, 동백나무, 산수유처럼 가난살이를 즐기자. 꽃눈에 힘 모으고. 해거리라 쓰고 풍작이라 읽는 법을 시인에게서 배운다. 가난살이라 쓰고 넉넉살이라 읽 -
[시로 여는 수요일] 꽃싸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3.11 17:44:35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하얏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가는데 당신은 옛 맹서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나는 한 손에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한 손에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이 -
[시로 여는 수요일] 의자
사회 피플 2025.03.04 17:46:19이 의자에 앉기까지 삼십 년이 걸렸다 비로소 의자에 앉아보니 의자가 우뚝 서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아래를 굽어볼 수 있다니 그의 허리도 의자처럼 덩달아 꼿꼿해졌다 또 의자에 기대어 옆에 서 보니 의자는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끌어당겨 만져보니 숨겨놓은 애인처럼 포근했다 이 의자에 앉기까지 생을 막다른 길에 몰아 넣었다 생각하니 허망했다 의자는 앉아 있는 걸까 서 있는 걸까 의자에 엉덩이를 뜯어 먹혀 본 -
[시로 여는 수요일] 딱딱한 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2.25 17:44:23부고 몇 개가 봄보다 먼저 왔다 싸락눈 떨어지는 거리에서 좌판을 지키던 여자가 영정에 갇혔다 여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스냅 사진 속 여자의 노란색 원피스가 하얗게 바래가는 동안 노점 뒤편 간판이 부동산에서 옷가게로, 통닭, 커피, 피자를 거쳐 다시 부동산으로 바뀌어왔다 마른 호박고지를 잔털 숭숭한 냉이로 바꾸어 놓고 봄을 당기던 여자는 황사 속으로 스몄다 주인 잃은 파라솔이 찢어진 귀를 흔들며 가로수의 조문을 -
[시로 여는 수요일] 새
사회 피플 2025.02.19 05:30:00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가난하고 외롭게 살던 시인은 -
[시로 여는 수요일] 지옥은 천국이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2.11 17:45:38지옥은 천국이다 지옥에도 꽃밭이 있고 깊은 산에 비도 내리고 새들이 날고 지옥에도 사랑이 있다 나 이 세상 사는 동안 아무도 나를 데려가지 않아도 반드시 지옥을 찾아갈 것이다 지옥에서 쫓겨나도 다시 찾아갈 것이다 당신을 만나 사랑할 것이다 지옥에도 꽃밭이 있는지, 깊은 산이 있고, 비가 내리는지, 새들이 나는지 몰라도, 지옥에도 사람이 있다면 사랑이 있을 것이다. 사랑이 있다면 지옥도 아주 지옥은 아닐 것이다. 단 -
[시로 여는 수요일] 진정한 멋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2.05 05:00:00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사치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위해 나머지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 제대로 된 사치는 최고의 절약이고 최고의 자기 절제니까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멋을 간직해야 한다 비할 데 없는 고유한 그 무엇을 위해 나머지를 과감히 비워내는 것 진정한 멋은 궁극의 자기 비움이고 인간 그 자신이 빛나는 것이니까 대개 사치를 덕목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옥편에서 ‘사치할 사(奢)’자 -
[시로 여는 수요일] 갈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1.22 05:00:00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날카로운 잎 서걱거리는 무사들이 울고 있을 줄 몰랐다. 바람 불 때마다 일제히 물결칠 때 한마음으로 환호하는 줄 알았다. 무리 지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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