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조선이 미국 조선업 재건을 위한 프로젝트인 ‘마스가(MASGA·미국 조선을 다시 위대하게)’의 핵심 파트너를 맡는 등 위상을 높이고 있지만 정작 글로벌 컨테이너선 수주 무대에서는 중국에 연달아 고배를 마시고 있다. 중국산 선박에 대한 미국의 강도 높은 규제의 반사이익을 누릴 것으로 전망됐지만, 낮은 가격을 무기로 내세운 중국 선사들이 글로벌 발주를 싹쓸이하며 한국의 점유율은 10%대로 후퇴했다.
업계는 중국 조선업이 컨테이너선 건조 경험을 토대로 기술력을 빠르게 끌어올릴 경우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등 한국의 특화 선종으로 경합이 번져 미래 패권 다툼이 불리해질 가능성이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글로벌 대형 컨테이너선 발주 프로젝트 쓸어담는 中
4일 업계에 따르면 세계 2위 해운사인 덴마크 머스크는 연내 발주할 계획인 액화천연가스(LNG) 이중연료 컨테이너선 최대 12척의 건조 작업을 중국 조선사에 맡기기로 가닥을 잡았다. 머스크의 최종 검토 명단에 오른 곳은 중국 뉴타임스조선과 양쯔강조선으로 알려졌다. 거래가 성사될 경우 수주 규모는 25억~28억 달러(약 3조 5000억~3조 92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에선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042660)이 머스크의 입찰에 참여하며 대규모 수주 기회를 노렸지만 가격 경쟁력에서 중국 조선사에 밀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형 LNG 이중연료 컨테이너선의 경우 한국 조선소의 가격이 중국 조선소 대비 1척당 최대 3000만 달러가량 비싼 편이다.
국내 조선 업계는 최근 저렴한 가격을 앞세운 중국 조선사들에 번번이 대형 수주 건을 내주고 있다. 앞선 7월 세계 1위 해운사 스위스 MSC는 중국 조선소 5곳에 컨테이너선 20척 건조를 발주했다. 이어 8월에는 프랑스 CMA-CGM가 약 3조 원 규모의 LNG 이중연료 컨테이너선 10척 건조를 중국 다롄조선중공업에 맡겼다. 두 해운사는 한국과 중국을 저울질하다 결국 가격과 납기에서 앞선 중국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9월 MSC에게 LNG 이중연료 추진 컨테이너선 10척 수주에 성공하며 시장에 진출한 헝리 조선소는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MSC로부터 초대형 컨테이너선 16척 추가 주문을 받는 데 성공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글로벌 컨선 점유율 10%대 회귀…중국 규제 반사이익은 ‘일장춘몽’
낮은 가격을 무기로 내세운 중국에 연달아 대형 컨테이너선 건조 프로젝트를 내주며 한국의 점유율은 10%대까지 낮아졌다.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8월 기준 HD한국조선해양(009540)·한화오션·삼성중공업(010140)은 올해 컨테이너선 58척을 수주하며 척 수 기준 점유율 16.7%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환산톤수(CGT) 기준 점유율은 21.5%로 3월 말 기준 29.7%에서 큰 폭으로 낮아졌다.
한국 조선업의 컨테이너선 점유율이 크게 낮아진 반면 3월 말 58.1%이었던 중국의 점유율은 76.7%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중국은 87.3%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컨테이너선 시장을 제패했는데 다시금 시장을 야금야금 장악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 조선업이 컨테이너선 시장에서 다시 지배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유럽 선사의 발주 물량을 중국이 싹쓸이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은 글로벌 톱5 해운사 중 4곳을 보유한 핵심 시장이다. 선복량 기준 이달 점유율은 MSC 20.6%, 머스크 14.1%, CMA-CGM 12.2%, 하파그로이드 7.3%이다. 합산 점유율은 54.1%로 글로벌 해운업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은 올 들어 유럽 선사들로부터 컨테이너선 발주를 단 한 건도 따내지 못했다. 8월까지 누적 수주도 각각 6척, 2척에 불과한데 이 물량들은 정치·군사적 이해관계 때문에 중국에게 발주를 주지 않는 대만 등 아시아 국가에서 발주됐다. 최근 한화오션이 수주한 7척의 컨테이너선도 대만 국적의 양밍해운이 발주했다. HD한국조선해양이 9월까지 유럽 선사들로부터 34척을 포함해 총 56척을 수주하며 그나마 체면을 지켰지만, 전체 판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다.
유럽 선사들이 국내 조선사들을 외면한 채 중국으로 향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격이다. 중국 조선사들은 글로벌 컨테이너선 선가보다 10%나 낮은 가격으로 입찰을 따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대비 압도적으로 저렴한 인건비와 저렴한 후판 등의 원자재 가격, 정부의 정책금융을 등에 업고 가격을 무기로 글로벌 컨테이너선 시장을 장악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중국산 선박에 부과하기로 한 입항세에 글로벌 선사들이 대응력을 갖췄다는 점도 국내 조선사들에게는 불리한 여건이다. 유럽 주요 선사들의 선대 중 중국산 선박의 비중은 20~40% 수준이다. 문제는 유럽 선사들은 미국향 선복량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이다. 1위인 MSC의 미국향 주간 선복량은 5만 1091TEU(1TEU=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로 유럽 선복량 10만 8020TEU의 절반에 불과하다. 2위 선사 머스크 역시 미국 선복량이 6만 8674TEU로 유럽 7만 7480TEU보다 낮다.
조선 업계 관계자는 “연초 유럽 선사들이 국내 조선사의 문을 두드렸던 것은 미국의 입항세 파장이 어디까지 커질지 몰랐기 때문”이라며 “이미 대부분의 선사들은 기존 선대로 미국 입항세에 대한 대응이 충분히 가능해진다고 판단해 국내 조선사가 반사이익을 누릴 여지가 좁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당장 돈 되는 LNG선에 집중하지만…기술격차 빠르게 좁혀온다
국내 조선사들은 2028년까지 슬롯이 가득 차 있어 고부가 선종인 LNG 운반선 등을 중심으로 수주전을 펼치면 당장의 수익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실제 삼성중공업은 최근 컨테이너선 프로젝트 입찰에 뛰어들지 않고 LNG 운반선과 FLNG 등의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중국이 컨테이너선 건조 경험을 토대로 기술력을 빠르게 끌어올릴 경우 한국 조선업이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는 선종까지 영향력을 키우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미 중국은 한국이 특화됐다고 평가받던 LNG 이중연료 추진 선박을 다량 수주하면서 기술력에 대한 신뢰도가 형성되고 있다”며 “당장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중국이 컨테이너선 물량을 싹쓸이해가는 걸 지켜보기만 하면 한국이 갖고 있는 기술적 우위가 10년 후에도 이어질지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