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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윤석의 영화 속 그곳]'애끓는 父情' 품은 초가, 운명을 감싸안다

(16)양평 '내경의 집'-'관상'

유명산 산자락에 외로이 놓인 초가 한채

내경이 아들·처남과 지내던 소박한 터전

높다란 억새풀에 부드러운 산 능선 장관

"너는 벼슬에 오르면 禍를 입을 상이야"

아버지 만류 거부하고 관직에 오른 진형

'운명이란 벽에 맞서 싸운다' 메시지도

유명산 산자락에 위치한 초가인 ‘내경의 집’.




유명산 산자락에 위치한 초가인 ‘내경의 집’.


한재림 감독의 영화 ‘관상’은 지난 1453년 일어난 ‘계유정난’을 서사의 큰 줄기로 삼는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이 역사적 사실과 거의 유사하게 펼쳐진다. 모두가 아는 익숙한 이야기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것은 당대 최고의 관상가인 내경(송강호 분)의 스토리다. 역적의 자손으로 태어나 깊은 산에 칩거하던 내경은 자신의 용한 재주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기생 연홍(김혜수 분)의 제안에 이끌려 한양으로 향하면서 예기치 않은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경기도 양평에 있는 유명산의 설매재 고갯길을 오르면 ‘관상’의 촬영지인 초가 한 채가 나온다. 산자락에 아담하니 자리한 이곳은 내경과 처남 팽헌(조정석 분), 아들 진형(이종석 분)이 한양으로 떠나기 전에 함께 살던 집이다. 설매재는 눈(雪)이 많이 내려도 매화(梅花)가 자란다고 해 붙은 이름이다.

가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차를 타고 설매재 휴양림 입구를 지나 조금만 더 올라가면 오프로드 체험장인 ‘엑스라이프 ATV’와 컨테이너 형태의 매점이 보인다. 매점 바로 옆의 차량 차단기 너머로 산을 향해 난 길이 있다. 이곳을 입구로 삼고 걸으면 30분 만에 ‘관상’ 촬영지에 닿는다.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담벼락은 정겹고 황토 빛깔의 아궁이는 아늑한 정취를 전한다. 내경과 팽헌·진형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닭을 삶아 먹던 평상도 그대로 놓여 있다.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다소 방치된 듯한 느낌도 들지만 ‘관리의 손길’을 타지 않은 덕분에 꾸밈없는 개성이 오롯이 묻어나온다. 원래는 2012년 당시 촬영을 위해 만든 세트장이었으나 영화가 900만 관객을 동원할 만큼 인기를 끌면서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관상’을 보지 않은 여행객에게도 이곳을 망설임 없이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초가에 이르는 길에서 만나는 풍경이 워낙 아름답기 때문이다. 초록 나무들은 초여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높다란 억새풀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춤을 추듯 이리저리 흔들린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산의 능선들은 위압적인 기세로 짓누르는 대신 부드러운 품으로 방문객을 끌어안는다.

‘내경의 집’ 한쪽에 놓인 황토빛 아궁이.


‘내경의 집’으로 향하는 길 위에 서 있는 나무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유명산의 산책로에 억새풀이 한가득 펼쳐져 있다.


유명산을 가득 메운 억새풀과 푸른 나무들.


한양으로 올라와 연홍의 기생집에서 손님들의 관상을 봐주던 내경은 어느 날 팔자에 없던 궁궐에 입성하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저잣거리에 특출난 관상가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문종(김태우 분)과 좌의정 김종서(백윤식 분)가 역모를 꾀할 관상을 지닌 자를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위해 내경을 부른 것이다.

아버지가 일생일대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이 아들 진형은 역적의 자손임을 숨기기 위해 이름까지 바꾸고 과거 시험을 보러 간다. “역적 집안에서 벼슬이라니 개가 웃을 일이로구나. 너는 벼슬에 들면 화(禍)를 입을 상이야”라는 내경의 협박에 가까운 경고도 아들의 뜻을 굽히지는 못한다. 이후 총명한 머리로 장원 급제를 한 아들에게 내경은 “작은 벼슬이라고는 하나 허드렛일이 대부분 아니냐. 너의 이름도 쓰지 못하고 한스럽지 않으냐”라고 묻는다.



아버지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진형은 의젓한 말투로 이렇게 답한다. “더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는 내 팔자를 탓하기보다 작은 벼슬이지만 본분을 다하는 게 조금이나마 조부의 죄를 씻어내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영화 ‘관상’의 스틸 컷.


영화 ‘관상’의 스틸 컷.


진형의 이런 꼿꼿하고 대찬 성품은 자신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문종이 승하하자 기다렸다는 듯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은 관리와 궁녀들을 향해 “나에게 찬동하는 자는 이쪽 편에 서라. 그렇지 않은 자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야”라고 말한다. 마음을 영악하게 먹고 몇 걸음만 옮기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으나 진형은 그저 자신의 운명이 예비한 길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관상을 보는 일로 집안을 일으켜 아들놈에게 좋은 옷도 입히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게 할 것”이라던 아버지의 소박한 소망은 무참하게 찢겨버린다.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기 힘들 만큼 비극적인 영화지만 ‘관상’은 결국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갈 뿐이라고, 팔자소관을 거스르는 것은 재앙을 자초할 뿐이라고 고개를 떨구지 않는다. 대신 하늘이 미리 점지한 운명이라는 것이 설사 있다 해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 어느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라는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치는 인간의 숭고한 결기에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한다. /글·사진(양평)=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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