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그의 유산은 9월 기준 70억 달러로 추산된다. 한화로 8조원이 넘는 돈으로 필부들은 상상조차 불허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이처럼 세계적 명성과 부를 축적한 잡스가 질병으로 죽음을 맞게 됐을 때 심리는 어땠을까. 정말로 편히 삶을 정리할 수 있었을까. 혹여 아쉽거나 억울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까.
박소란 기자 psr@sed.co.kr
스티브 잡스는 철저히 베일에 싸인 삶을 산 것으로 유명하다. 마지막 가는 길인 장례식조차 비공개로 비밀스럽게 치러졌다. 때문에 건강 악화로 올 8월 애플의 최고경영자(CEO)직에서 물러난 뒤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까지 그의 생활이나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잡스는 사망하기 전 몇 주일 동안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고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을 만큼 쇠약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명료한 정신과 활기찬 유머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가족 곁에서 편안히 잠들었다는 게 애플과 유족 등 측근들의 공식 발표 내용이다.
하지만 떠난 자의 진정한 속내는 알 수 없는 법. 그가 세상에 남긴 유산을 재산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최고의 부와 명예, 일에 대한 왕성한 열정을 지닌 잡스가 과연 말처럼 편안히 세상에서 ‘로그아웃’ 할 수 있었을까.
잡스는 강심장?
잡스의 건강에 이상신호가 감지된 것은 지난 2004년. 당시 췌장암 진단을 받은 그는 체중이 20㎏ 가까이 줄 정도로 야위었고 항암치료 환자들의 전형적 특징인 탈모 증상까지 나타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9년에는 호르몬 이상으로 간 이식 수술도 받았다. 올 8월에는 병세 악화를 이유로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불과 2개월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말하자면 잡스는 2004년부터 줄곧 병마와 싸워왔다. 7년간 어떤 심정이었을까.
워낙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던 잡스였기에 의중을 짐작할만한 단서조차 찾기가 쉽 지 않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일반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암 선고를 받은 후에도 신제품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처럼 강인한 카리스마를 잃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2005년 스탠퍼드대학 졸업식 연설을 들 수 있다. 그날 잡스는 “죽음은 삶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리고 이렇게 부연했다.
“곧 죽게 된다는 생각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마다 큰 도움이 된다. 사람들 의 기대, 자존심,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무의미해지고 정말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죽음 앞에서 이토록 의연할 수 있다니 잡스는 선천적 대인배 혹은 강심장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실제로 여러 전문가들에 따르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데서 오는 체념 못지않게 회한 또한 크게 느낀다. 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했던 일들이 많을수록 그 정도 또한 심하다고 한다.
중앙대 심리학과 허성호 박사는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인간은 누구나 존재 욕구가 강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일을 중시한다”며 “그런 면에서 죽음은 곧 박탈감, 상실감, 불안감을 안겨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아무리 강인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도 피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허 박사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이들은 대체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상대적으로 가벼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인간의 기본 욕구 중 최고단계가 바로 자아실현의 욕구예요. 우리와 같은 일반인은 자아를 실현해가는 과정에 있지만 이미 자아실현을 이룬 극소수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그들의 경우 죽음에 대한 수용의식이 훨씬 높습니다.”
이 시대 최고의 CEO로 칭송받으며 유명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던 잡스가 죽음 앞에 어느 정도 담대한 듯 보이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이룬 자의 겸허한 수용
하지만 아무리 자아실현에 일찌감치 성공했다고 해도 어떻게 막대한 부와 명예를 뒤로하고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지 필부들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도 천수(天命)를 누리지 못하고 질병에 의해 강제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에 대해 허 박사는 “무엇이든 결핍된 상태에서는 그것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하겠지만 이미 일정 수준 이상으로 충족돼 있다면 욕구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고 전했다. 충분히 배가 부르다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봐도 집착하지 않는 것처럼 잡스 역시 부와 명예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부와 명예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에서는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일에 대한 열정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잡스였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2007년 아이폰, 2010년 아이패드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글로벌 IT 업계를 뒤흔들었던 잡스가 죽기 전까지 또 다른 혁신적 제품을 구상 중이었다는 제법 솔깃한 ‘설’까지 떠돌고 있지 않은가.
전문가들도 이 점에는 동의한다. 부와 명예에 대한 상실감보다는 더 이상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심리적 안타까움이 컸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다수의 심리학자들은 잡스가 자신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애플이 어려움에 봉착한 때가 아니라 그 위상이 한층 탄탄해진 시점에 눈을 감았기에 비교적 편안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허 교수도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했기에 일에 대한 맹목적 열의보다는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데 남은 시간을 소비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결과적으로 심리학적 관점에서 잡스는 평범한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억울하거나 아쉬운 감정에서 한 차원 떨어져 편안한 임종을 맞았을 개연성이 높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잡스의 사망 이후 얼마간 알 수 없는 박탈감과 상실감에 휩싸인 것은 오히려 대중들이었다. 허 교수는 “잡스가 세계 시장에서 워낙 막대한 지배력을 행사했던 인물인지라 그의 죽음에 대한 대중의 아쉬움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며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에 인간적 감동을 느끼는 이도 많겠지만 다수의 대중은 그의 혁신적 제품을 더 이상 접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큰 것 같다”고 풀이했다.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는 잡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쩌면 이 같은 불안감의 표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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