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라면 가는 소·돼지인가" 월드타워 면세점 워킹맘들 한탄
고용승계 불안에 휴직도 꺼려
"1년간 투자해 키워놨더니 폐점" 명품업체들도 신규 입점 기피
"우리가 소·돼지인가요. 여기 가라고 하면 여기 가고, 저기 가라고 하면 저기 가야 하는 떠돌이 신세라니요. 1,300명의 직원이 매일 같이 밤을 새며 새로 오픈한 월드타워점이 1년 만에 문을 닫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앞으로 우리나라 면세점 직원들은 오랫동안 일궈놓은 생활 터전과 일터를 상실하는 공포 속에서 살게 될 거예요.(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 30대 여직원)"
롯데면세점 월드타워점이 특허권을 박탈당해 5년 계약직 신세로 전락한 면세점 직원들의 불만이 증폭되고 명품업체들이 신규 면세점 입점을 기피하는 등 예상대로 '5년짜리 엉터리 면세점 정책'의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다.
월드타워점은 올해 예상 매출 6,000억원에다 유커 매출 신장률(30%)이 가장 높은 면세점인데도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게 된 직원들은 "정부의 규제 논란으로 애꿎은 노동자만 피눈물을 흘리게 됐다"고 개탄했다. 이들은 최근 면세점 특허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관세청에 탄원서를 제출한 데 이어 자발적으로 면세대책위원회를 구성, 정부를 상대로 항의 시위까지 고려하고 있다.
롯데 측은 월드타워점 직원들을 소공점과 인천공항점·코엑스점에서 흡수한다는 방침이지만 직원들은 인천으로 가면 4년짜리, 코엑스로 가면 2년짜리 계약직으로 전락할 뿐 "사실상 갈 곳을 잃었다"고 호소한다. 아울러 두산이나 한화갤러리아·신세계면세점 등 신규 사업자들이 고용 승계를 약속했다고는 하지만 기업 문화와 복지 혜택 등이 다른 마당에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고 토로한다. 특히 1,300여명의 직원 중 85%가 여성이고 30~40대 워킹맘들이 다수여서 5년마다 일터를 이전하는 것은 두려움과 걱정이 크다는 지적이다.
월드타워점의 30대 여직원은 20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도 애사심이 있는 사람인데 고용 승계 운운하면서 아무 데나 가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야 하느냐"며 "지금은 30대 중반이지만 5년 뒤 40대, 10년 뒤 50대인데 나이 들수록 구직도 어려워지는데다 회사를 옮기면서 점점 더 낮은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분개했다. 지난해 월드타워점으로 발령받고 잠실 근처로 이사했다는 그는 "행여 인천으로 발령이 나면 새벽 5시에 세 살배기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해야 할 판"이라며 "나와 같은 처지의 워킹맘이 대부분"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지난해 신세계면세점이 김해공항 사업권을 획득하는 바람에 자리를 옮긴 롯데면세점 김해공항점 직원들 일부도 지난해 10월 월드타워점으로 옮긴 지 1년 만에 다시 갈 곳을 잃은 신세가 됐다. 육아휴직 중인 한 여직원은 "휴직하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회사가 없어졌다"며 "돌아갈 곳이 막막해 매일 불안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야간 면세점을 운영할 방침인 두산의 경우 24시간 3교대여서 고용 승계가 이뤄지더라도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여직원들 대다수가 이직을 꺼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명품업체들도 한국의 시한부 면세 정책에 비난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토리버치·토즈 등 일부 글로벌 브랜드는 "한국 면세 시장의 지속 가능성과 투자에 의구심이 든다. 이는 국가적인 이미지 실추가 염려되는 부분"이라는 내용의 항의서한을 관세청에 보냈다. 월드타워점에 입점한 한 글로벌 브랜드는 "1년간 투자해서 키워놓았는데 정책이 바뀌었다며 문을 닫으라고 하니 황당한 노릇"이라며 "영업 환경이 불안한데 앞으로 한국에서 투자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이런 상황 속에 명품업체들은 특허 만료 후 고용인력, 재고물량 처리 등 각종 문제가 우려된다며 이달 말부터 문을 여는 시내 신규 면세점의 입점을 기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신규 면세점 뿐 아니라 기존 업체 역시 명품들과 협상할 때 저자세일 수밖에 없다"며 "한국 면세점의 경쟁력 추락은 불가피하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시간과 비용·노하우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됐다는 점은 엄청난 사회적 낭비가 아닐 수 없다. 3,000억원을 투자한 월드타워점의 화려한 매장은 당장 빈 공간으로 남게 됐고 800억원을 들여 개보수한 워커힐 면세점은 공간 활용도 문제거니와 23년간 쌓아온 노하우가 물거품이 됐다. /심희정기자 yvette@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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